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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학자 일색의 한반도 학술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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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한국이나 동아시아 안보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를 비롯해 많은 학자가 이를 주제로 삼은 국제 학술회의에서 모인다. 그들의 연구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보통 4성급 혹은 5성급 호텔에서 열린다.

안보 학술회의 성비 불균형 심각 #국적·머리색 달라도 대부분 남자 #남성 학자들 유유상종 토론 대신 #뛰어난 한·미 여성 학자 참여 기대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가 모여 온종일 각종 현안을 다루고 한·미 동맹 관련 정책 전망을 토론한다. 또 학자들은 회의에서 그들의 최신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신문·방송 등 매체는 행사 진행 과정을 꽤 비중 있게 보도하기도 한다. 국제회의에서 표명된 견해가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에서 벌어지는 정책 의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학술회의는 연구와 무관한 문제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도마에 오르고 있다. 회의 참가자들의 남녀 성비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연구자들을 살펴보면 한국 정치나 안보 문제는 남자들만 연구하는 듯하다.

학자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한국·미국·유럽·러시아·일본·중국·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왔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안경을 끼고 어떤 이들은 안경을 끼지 않았다. 검은색·갈색·은색 등 머리 색깔도 다양하다. 머리를 염색한 사람도 적잖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남자 화장실을 드나든다는 점이다.

SNS에 올라온 회의 사진을 보면 패널 참가자 대부분 짙은 색 양복에 넥타이를 유니폼처럼 착용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피필드 기자는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 번은 그가 한국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의 두 군데 패널에 들렀다. 둘 다 남자밖에 없었다. 피필드 기자는 남자들만 패널 토론을 하는 사진 4장을 SNS에 올렸다. 그는 ‘한반도 주민의 절반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아는지 모르겠다’며 이 국제회의에 ‘매널(manel)’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매널은 맨(man, 남자)과 패널(panel)의 합성어라고 한다.

SNS 댓글에는 이런 말들이 붙었다. ‘한국에서 또 매널이 열렸다고요?’ ‘이 연구 분야에 여성은 없나요?’ ‘한국의 안보와 외교정책에서는 남자들 의견만 중요한가요?’

나 또한 지난 수년간 성차별이 있다고 느꼈다. 부당한 일이다. 한국과 미국에는 한국 문제를 연구하는 최상급 여성 학자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 학자들은 남성 학자들 못지않게 연구 수준이 높고 정책에 유용한 시사점을 줄 안목(relevance)도 높다. 앞으로 이런 불균형이 계속 유지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차세대 여성 학자들의 미래는 태평양 양쪽에서 두루 밝다. 외교 전문인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로 선발된 한국 외교관들에게 강연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다.

지금 한국 외교부의 수장은 여성이다. 근래 한국 신입 외교관의 60%는 여성이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들은 공식석상에서 질문할 때 신참 남성 외교관보다 적극적인 편이다. 남성보다 사교성도 좋다. 서울 본부와 해외 대사관에서 근무할 외교관의 성비(性比)가 균형 있게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또한 세계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한국에서 보다 많은 여성이 조직의 운영과 정책 결정을 맡은 자리에 진출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을 살펴보면 한국 관련 국제관계 이론이나 외교정책 분야에서 많은 여성 학자가 혁신적 성과를 내놓으며 급부상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전공하는 한국학 전공자들이다. 한국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정치·역사 학자도 많다. 그들은 대학교수이거나 싱크탱크 연구원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북한 핵실험이나 한국 대통령의 방미처럼 한반도 관련 사안이 생기면 각 지역 언론이 그들의 의견을 구한다. 미 언론은 가까운 곳의 대학이나 연구소 전문가들을 자주 찾는 경향이 있다.

떠오르는 여성 학자군을 알파벳 순으로 거론한다면 방지은(미시간대), 브리짓 카긴스(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 리사 콜린스(CSIS), 앨리스 에크먼(IFRI), 샌드라 파히(일본 상지대), 시나 그레이튼스(미주리대), 캐서린 캐츠(노스웨스턴대), 앨런 김(남가주대), 이지영(아메리칸대), 로런 리처드슨(ANU) 등이다.

이들은 한국학과 외교정책 분야의 미래를 좌우할 학자들이다. 이들이 앞으로 미국과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학술회의의 성비 균형을 맞추는 데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이들 여성 학자가 끊임없이 비슷한 의견을 확대재생산하는 ‘매널’에 초대받았는데 참가를 거부한다 해도 결코 비난하지 않겠다. 성공적인 학자가 되기 위해 연구와 강의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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