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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흥청대는 홍대 앞은 오해 … 지식의 최전선 ‘경의선 책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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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환영의 지식의 현장 

전철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에 ‘경의선 책거리’가 250m 길이로 조성됐다. 현재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문학산책’ 부스에서 방문객이 책을 읽고 있다. [신인섭 기자]

전철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에 ‘경의선 책거리’가 250m 길이로 조성됐다. 현재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문학산책’ 부스에서 방문객이 책을 읽고 있다. [신인섭 기자]

 음주가무(飮酒歌舞)는 좋다. 하지만 음주가무만으로는 뭔가 허전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모든 학문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인 삶(contemplative life)'이야말로 최고의 선(善)이자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요(逍遙)학파의 창시자다. 소요학파는 산책학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제자들과 산책하면서 학문을 논하고 인생을 논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환생한다면 홍익대 앞 '경의선 책거리'를 즐겨 찾을 것이다.

점심엔 직장인, 낮에는 유모차 #주말엔 가족들, 밤에는 데이트 #가족·웨딩 포토 장소로도 각광 #드라마·영화 촬영 장소로 인기 #본드 흡입 같은 불미스러운 일 #사라지고 도시 재생 효과 톡톡 #주택가와 인접해 초기에는 #소음 문제로 갈등 빚기도

서울 마포구 홍대 앞은 아무래도 음주가무를 연상시킨다. 클럽 문화의 발상지다. 하지만 밤낮 흥청댄다는 오해는 반쯤 맞는 이야기다. 홍대 앞에는 책방도 있고 북카페도 있다. ‘정적인 문화’를 상징하는 제2의 홍대 앞이 있다. 특히 다음달이면 1주년을 기념하는 ‘경의선 책거리’(이하 책거리)가 있다. 책거리는 역동적인 ‘젊음의 거리’ 홍대 앞과 묘한 균형을 이루며 상생한다.

겉으로 보면 책거리의 ‘정체’는 단순하다. 기차간 모양의 14개 동 책방이 있는 산책로이자 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10여만 권의 책이 비치돼 있다. 부스는 세계 최초로 지하에 묻혀 있던 하수도관을 개조해 만들었다. 책방 기능을 하는 부스에서는 ‘일반 베스트셀러가 아닌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 ‘문학산책’ 부스에서는 시집이 많이 팔린다. ‘인문산책’ 부스에선 원래는 디스플레이용으로 가져다 놓았던 무겁고 진중한 전집 세트가 많이 나간다. 인근에 선생님, 교수, 전문직 종사자, 회사원이 많이 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책거리는 슬로라이프(slow life)의 현장이다. 평일 점심에는 회사원, 낮에는 유모차가 많이 보인다. 주말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저녁엔 손꼽히는 데이트 코스다.

어디에 있을까. 전철 경의선 홍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250m 책거리가 와우교까지 펼쳐진다. 홍대 앞 다른 곳을 섭렵하다 책거리에 오면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고 걸음걸이도 ‘에지’ 있게 바뀐다”고 책거리의 김정연 총감독이 말한다. 사실 이곳을 조성할 때 만취한 술꾼들이 점령군처럼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1의 홍대 앞’에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온 분들도 이곳에 오면 숙연해진다. 산책학파의 진중한 학생처럼 된다. 쓰레기나 술병은 아주 가끔씩 발견된다고 한다. 사실 책거리 조성 전 이곳은 본드 흡입이나 자살 같은 사건·사고가 있었던 곳이다. 책거리는 도시 재생 효과를 톡톡히 거뒀다.

책거리를 디자인한 ‘철학’을 뜯어보면 꽤 복잡하다. 우선 ‘책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콘셉트가 바탕이다. ‘홍대 하면 문화·예술이다’라는 관념에 책거리는 화룡점정(畫龍點睛), 클라이맥스 노릇을 한다. 시간과 세월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도 책거리의 중요한 포인트다. 일부 조형물을 철길 재료로 만들었기에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세월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곧 책거리에는 담쟁이가 올라올 예정이다. 담쟁이는 시간과 역사가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이곳은 ‘구민(區民) 민주주의’의 현장이기도 하다. 책거리는 구민 대상 여론조사를 열심히 한다. 많이 듣기 위해서다. 예술·예술가의 거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은 주택가와 인접해 있기에 처음에는 공연에 따르는 소음 때문에 인근 주민의 항의도 있었다. 서로 맞춰 가는 과정에 있다. 공연할 때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가능하면 행사를 오후 9시 안에 끝내려고 노력한다. 공존과 상생을 탄생시키는 대화와 타협만 있으면 사실 웬만한 것은 다 해결된다. 주민들도 지금은 호의적으로 많이 변했다. 많은 주민에게 행사는 소음이 아니라 또 다른 ‘즐길거리’가 됐다. ‘밝게 조성해 달라’는 지역주민 요청도 수용했다. 밤에 가면 낮에 갔을 때와 또 다르다.

백석의 『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오형규의 『십대를 위한 경제 교과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등 ‘시민이 사랑하는 책 100선’(2년마다 교체)을 선정하는 과정도 주민과 전문가들이 함께 협의했다. 책거리는 ‘참여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공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거리는 아기자기하고 지적인 거리다. 소소한 볼거리가 많다. 가족 사진부터 웨딩 포토까지 포토존도 여럿 있다. 책거리역이 가장 인기 있다. 월요일은 쉰다. 다른 날은 항상 저자와의 만남 등 다양한 문화·공연행사가 열리고 있다. 오늘은 어떤 행사, 다음달은 어떤 축제가 있는지 알아보려면 책거리 웹사이트(gbookst.or.kr)에 미리 가 보면 된다.

책거리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어린왕자’ 조형물을 보고서는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아들딸들에게 엄마·아빠가 데이트할 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기재(器財)가 있다. 예컨대 역사(驛舍) 이름을 적어 놓은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을 가리키며 “아빠랑 엄마가 데이트할 때 신촌역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갔는데 여기 나오는 이런저런 역들이 있었어”라고 들려줄 수 있다.

주변 상권과 충돌하는 게 아니라 상생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였다. 책거리의 목표는 주변의 유명 책방·북카페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상생하고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출판산업 불황을 이겨 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책거리는 관광 볼거리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성공적이다. 책거리 개장 후 주변 카페 등 상권이 더욱 활성화됐다.

홍대 인근에 1000개의 출판사가 밀집해 있다는 것도 책거리 조성의 중요한 배경이다. 마침 최근에는 파주로 갔던 상당수 출판사가 마포구·홍대 앞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곳을 조성한 마포구청은 책거리 전도사다. 우리나라 전역에 책거리가 많아지기를 꿈꾼다. 다른 지자체에서 책거리를 벤치마킹하러 온다.

책거리는 지난해 10월 28일 개장했다. 아직 첫돌도 맞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발전을 위해 차근차근 고민하고, 고민에서 나오는 솔루션을 실천하고 있다. 요즘 마포구청을 비롯한 책거리 주인공들은 국내외 각종 상을 받으러 가느라 바쁘다. 현재까지 4개를 받았다. 곧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상을 받으러 간다. 주요 포토존인 책거리역에 역장실도 꾸밀 생각이다. 새로운 조형물도 곧 설치된다. 새로운 포토존이 될 것이다. 구민·시민·국민을 넘어 ‘세계민’이 아끼고 사랑하는 책거리를 기대해 봄 직하다.

소문 듣고 개별·단체관광객도 많이 찾고 있다. 책거리는 홍대 앞 맛집들, 트릭아이미술관, 김대중도서관과 함께 ‘관광단지’를 이룬다. 책거리는 벌써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소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남이섬 못지않은 한류 성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