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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 나는 '비정규 육체파 제주 일꾼' 김태호입니다

중앙일보

입력

“당신은 왜 일하십니까?”

뻔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야 물론 돈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밥벌이 때문에 일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구두닦이ㆍ사육사ㆍ버스 기사…. 평범한 우리 이웃 14명의 입을 통해 우리가 진짜 일하는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직업의 정석: 당신은 왜 일하는가’ 열세 번째 주인공은 비정규 육체파 제주 일꾼 김태호 씨입니다. / 특별취재팀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는 김태호 씨. 그는 이 바다가 좋아서 제주로 이주했다. [사진 김태호 씨]

제주 앞바다를 바라보는 김태호 씨. 그는 이 바다가 좋아서 제주로 이주했다. [사진 김태호 씨]

대한민국 청년들의 꿈은 '공무원'이다. 지난 6월 전국 7개 시(市), 9개 도(道)의 9급 지방공무원 공채 시험엔 22만여명이 응시했다. 모집 인원(1만여명)의 22배다. 청년 실업률 10.3%의 나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이니까.

하지만 다른 꿈을 꾸는 사람도 있다. 1년 전 서핑이 좋아 제주도에 간 33살 김태호 씨가 그렇다. ‘하루 벌어 하루 노는 육체파 비정규 일꾼’, 이게 그의 직업이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 아니냐고?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게 내심 불편하단다. “난 그냥 현실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거다.

김태호 씨가 서핑을 하고 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가 서핑을 한다. [사진 김태호 씨]

김태호 씨가 서핑을 하고 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바다로 나가 서핑을 한다. [사진 김태호 씨]


청소는 일이고, 서핑은 놀이? 내겐 그저 육체 활동

"그날은 일하는 날인데…. 몸 쓰는 일이라 끝나고 나서 인터뷰하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인터뷰 약속을 잡으려 전화를 걸었을 때 김태호 씨는 이렇게 말했다.

7월의 한낮, 제주에 내려보니 그의 얘기가 핑계가 아니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제주의 여름은 습도가 80%에 육박한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막 물걸레질을 한 것처럼 바닥이 축축하다. 그런 곳에서, 한낮에, 그것도 실외에서, 몸을 쓴다니. 하물며 그가 하는 일은 집 짓는 공사, 입주 청소, 이사 도우미, 귤 따기, 인형 탈 쓴 행사 도우미 등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들이다. 태호 씨는 “그래도 덕분에 일감이 끊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제주에 온 뒤 김태호 씨는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한다. 카페 인테리어, 주택 수리 등 공사 현장에서 소위 '노가다'를 하기도 하고, 이사나 입주 청소를 하기도 한다. 겨울철엔 귤 따는 일도 한다. [사진 김태호 씨]

제주에 온 뒤 김태호 씨는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한다. 카페 인테리어, 주택 수리 등 공사 현장에서 소위 '노가다'를 하기도 하고, 이사나 입주 청소를 하기도 한다. 겨울철엔 귤 따는 일도 한다. [사진 김태호 씨]

태호 씨는 원래부터 ‘몸 쓰는’ 걸 좋아했다. 10대 시절 2년 간 신문 배달을 한 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였다. 3년 넘게 직장에 다녔던 건 지하 헬스장 때문이었다. 결국 헬스 트레이너로 전업했고 내친 김에 서울 모처에 헬스장을 차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엎어졌다.

"내 길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이제 뭐하나 싶었는데 제주가 떠올랐어요. 더 늦기 전에 제주에 가서 좋아하는 서핑을 실컷 해보자 싶었죠."

제주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몸 쓰는 일을 하게 됐다. 사실 그에겐 서핑이나 일이나 별 차이가 없다. 아니, 고되기로 따지면 서핑이 더하다. 태호씨는 "일이나 서핑이나 그냥 똑같은 육체활동"이라고 했다.

그래도 같은 값이면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힘든 게 몸 쓰는 일이 아니냔 말이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 몸이 고된 노동을 견딜 수 있을까.

"노가다를 안해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사무실에 2030만 있나요? 40대도, 50대도 있잖아요. 노가다판도 그래요. 어디서든 짬밥 먹는 만큼 기술과 노하우가 생기고 그만큼 대우를 받아요. 몸 쓰는 일이라고 다 힘으로 하는 건 아니예요."

태호씨가 말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희 부모님은 아직도 도배 일을 하세요. 아주 잘 하시죠. 그게 뭐 어떤가요?"

김태호씨는 "포기할 수 있는 걸 포기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김태호 씨]

김태호씨는 "포기할 수 있는 걸 포기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김태호 씨]


버릴 수 있는 걸 버리면 삶이 가벼워진다

제주에서 보름 정도 몸을 써서 일하면 100만원 정도를 손에 쥔다. 살아보니 그 정도면 먹고 마시고, 제주 생활의 필수품인 차도 몰 수 있었다. 태호씨는 그래서 아무리 일이 많이 들어와도, 한 달에 보름 이상은 일하지 않는다. 나머지 보름은 서핑도 하고 낚시도 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그에게 일이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다.

“미혼이잖아요.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이만큼의 일로도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지금에 만족해요. 누굴 만날 순 있겠지만 결혼은 생각 없어요.”

아무리 부양 가족이 없다고 해도 한 달에 100만원으로 살 수 있을까. 태호씨는 "선택과 집중을 하면 된다"고 했다. 그가 사는 곳은 제주도 외곽의 조립식 주택이다. 보증금 50만원에 연세(※제주에선 12개월치 월세를 한 번에 내고 집을 빌린다) 350만원이다. 제주의 집값이 다 그 정도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새 아파트는 보증금 1000만원에 연세 1000만원은 줘야 한다.

제가 바다에서 서핑하는 모습을 보면 화려해 보이죠? 근사한 욜로족처럼요. 근데 그런 거 아니에요. 포기해야 할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는, 그냥 똑같은 소시민이에요. 제가 포기하지 못하는 게 내 맘대로, 나답게 사는 거일 뿐이죠.

태호씨가 나답게 살기 위해 가장 신경 쓰는 게 있다. '마인드 콘트롤'이다.

“제주엔 저처럼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참 많아요. 부자도 있고, 전문직도 있고, 가정이 있는 사람도 있고 다양하죠. 서울 살 때였다면 아마 비교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선 안그래요. 관대하다고 할까요, 무관심하다고 할까요.”

김태호 씨는 "모두가 주어진 상황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며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자유는 없다"고 했다. [사진 김태호]

김태호 씨는 "모두가 주어진 상황에서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며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자유는 없다"고 했다. [사진 김태호]

한국은 비교 과업 사회다. 20살이 되면 남들 못잖은 대학에 가야 하고, 졸업을 하고 나면 남 부럽잖은 기업에 들어가야 하고, 그 뒤엔 남보다 늦지 않게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런 한국 사회에서 남에게 신경을 끄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 제가 제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럴 것 같아요. 모든 관계가 여기 다 있잖아요. 한데 저는 서울에서 왔잖아요. 관계가 많지도, 복잡하지도 않거니와 안보고 싶으면 안볼 수 있거든요. 아마 서울에 계속 있었다면 저도 서퍼로 살지 못했을 거에요."

나도 내일을 꿈꾼다

많은 이들이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더 넓은 집에서 살기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저당잡힌 채 살아간다. 태호씨는 아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꿈도, 계획도 없는 건 아니다.

"남들이 5년, 10년을 계획한다면 전 하루, 한 달, 1년을 계획해요. 단기 계획에 있어선 누구보다 꼼꼼하다고 자부해요."

연세 350만원짜리 그의 집에 있는 실내용 철봉 치닝디핑이 그 증거다. "제가 정말 운동을 좋아하잖아요. 근데 시골에 사니까 차 타고 한시간은 나가야 헬스장에 갈 수 있어요. 그래서 철봉업체에 제안서를 보냈어요. 나한테 치닝디핑을 보내면 어떤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아주 상세하게 써서요. 제가 나름 파워 블로거, 파워 인스타그래머거든요." 태호씨는 그렇게 공짜로 치닝디핑을 얻었다.

김태호 씨가 집에서 서핑 연습을 하고 있다. 왼쪽 끝에 살짝 보이는 게 '제안서'를 써서 얻은 실내용 철봉 치닝 디핑이다.[사진 김태호 씨]

김태호 씨가 집에서 서핑 연습을 하고 있다. 왼쪽 끝에 살짝 보이는 게 '제안서'를 써서 얻은 실내용 철봉 치닝 디핑이다.[사진 김태호 씨]

대학생 때 유럽여행을 가려고 자전거업체에 기획서를 써 보낸 걸 시작으로, 그의 인생은 기획과 제안의 연속이었다. 그 기획과 제안이 모여 오늘의 '제주 서퍼 김태호'를 만들었다.

당장 제주에서의 다음 1년을 위한 '제안서'도 썼다. 제주관광공사가 읍 단위 마을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젊은 여행가를 뽑아 1년 간 활동비를 지원하는 ‘삼춘PD’에 지원한 거다. 아쉽게도 공모에선 탈락했지만, 여전히 태호씨는 다음 1년을 위한 '제안'을 찾고 있다.

"제주 올 때 1년을 계획했어요. 올 연말이 1년이거든요. 전 지금 다음 1년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거냐고요? 그건 내년 이맘 때 와서 다시 물어보세요."

특별취재팀=김현예·정선언·정원엽 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디자인 김은교, 영상 조수진,개발 전기환·원나연 hykim@joongang.co.kr

김태호 씨(왼쪽)가 '제주 엄마'와 세화해변에 앉아 있다. 태호 씨는 제주로 이주하기 전 스탭으로 두 달 간 일했던 게스트하우스 대표를 '제주 엄마'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다음 1년을 준비 중이다. [사진 김태호]

김태호 씨(왼쪽)가 '제주 엄마'와 세화해변에 앉아 있다. 태호 씨는 제주로 이주하기 전 스탭으로 두 달 간 일했던 게스트하우스 대표를 '제주 엄마'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다음 1년을 준비 중이다. [사진 김태호]

나는 왜 일하는가

공사할 때 땅 파잖아요. 기반 공사를 해야 건물을 올리니까요. 근데 땅만 파다간 건물은 못짓죠. 저한테는 일이 그래요. 일은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땅이에요. 파서 다져놓아야 그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거에요. 근데 땅 파는 게 전부가 아니죠. 건물을 올리는 게 더 중요해요. 나답게 사는 거요.

김태호 씨가 한 달에 보름 일하고 나머지 보름은 서핑을 하는 이유다.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이 그에겐 ‘보름의 노동’인 것이다. 사실 태호 씨에겐 일과 놀이를 굳이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저는 직업인이에요. 직장인 하곤 다르죠. 뭘 하든 제가 주체가 되어서 선택해요.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원하지 않을 땐 일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저한텐 일과 놀이가 큰 차이가 없어요. 일을 하고 싶을 땐 일을 하고, 서핑을 하고 싶을 땐 서핑을 하니까요. 이게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랑 가장 큰 차이 같아요.

위 사진은 김태호 씨가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때의 모습이고, 아래는 제주 입도 후 모습이다. [사진 김태호]

위 사진은 김태호 씨가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때의 모습이고, 아래는 제주 입도 후 모습이다. [사진 김태호]

직장에 다닌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 태호 씨는 일을 시작할 때부터 프리랜서였다. 대학에서 디지털콘텐트 창작을 공부했고, 교육업체에서 일을 받아 콘텐트를 기획하고 디자인했다. 태호 씨는 “프리랜서로 일해봐서 직장이 없는 거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기피하는 ‘비정규 육체파 일꾼’으로, 누구보다 나답게 살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비정규 육체파 일꾼으로서 중요한 덕목은 무관심이다. 태호 씨는 말한다. “남들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들에 무관심해지면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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