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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철새 먹이려 농사 짓는 흑산도 농민들, '사람과 자연-공존 실험'

중앙일보

입력

신안군 흑산도 사리.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조밭이 철새를 위한 곳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신안군 흑산도 사리. 붉은색 원으로 표시된 조밭이 철새를 위한 곳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달 31일 오전 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 흑산도에 가니 어른 허리 높이까지 키가 자란 조가 가득 심어진 밭이 펼쳐졌다. 신안군청 환경녹지과 신선희(46) 자연환경 담당이 동료 이경규(44) 주무관과 함께 밭에 들어갔다. 신 담당 등은 조가 잘 자라고 있는지, 밭의 면적은 얼마나 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며 서류를 작성했다. 이날 섬 전체를 돌며 25필지의 조밭을 점검했다.

흑산도 주민 20명, 쉬어가는 철새 위해 조 농사 구슬땀 #주민들은 철새 먹이용 농사 짓고 신안군천 주민들 보상 #흑산도는 철새 이동 경로의 중간 지점으로 휴식 장소

두 사람이 목포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흑산도에서 점검한 조밭은 좀 특별하다. 주민들이 먹을 게 아니라 철새를 먹이기 위해 농사를 지은 곳이라서다. 사리 주민 조선출(73)씨는 “마을 사람들이 새밥을 주기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전남 신안군청 환경녹지과 신선희 자연환경 담당과 이경규 주무관이 지난달 31일 흑산도 사리에서 철새를 위한 조밭을 점검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신안군청 환경녹지과 신선희 자연환경 담당과 이경규 주무관이 지난달 31일 흑산도 사리에서 철새를 위한 조밭을 점검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흑산도 주민들은 철새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특별한 농사에 나섰다. 주민들은 철새들을 위해 농사를 짓고, 군청은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사람과 철새의 공존 실험’이다.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100㎞가량 떨어진 흑산도는 사람들에게는 유명 관광지이자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다. 동아시아~대양주 철새 이동 경로의 중간 지점으로 철새들은 월동지인 동남아시아 국가나 호주 등 지역과 번식지인 몽골과 시베리아 등 지역을 오가며 흑산도에서 휴식한다. 봄철과 가을철이 철새가 가장 많이 찾아오는 시기다.

서해상에 위치한 흑산도. 남쪽과 북쪽에서 철새들이 이동하며 쉬어가는 중간 기착지다. [사진 구글 지도 캡쳐]

서해상에 위치한 흑산도. 남쪽과 북쪽에서 철새들이 이동하며 쉬어가는 중간 기착지다. [사진 구글 지도 캡쳐]

국립공원연구원 철새연구센터에 따르면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흑산도와 인근 섬 홍도에서 373종의 철새가 관측됐다. 국내에 찾아오는 철새 전체 541종의 약 69%에 해당하는 수치다. 주로 크기가 작은 산새들이 흑산도에서 쉬었다가 목적지로 이동한다. 노랑턱멧새·되새·동박새·왕새매·제비 등이 흑산도에 자주 방문하는 산새들이다. 국내 미기록 철새가 흑산도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흑산도에서는 2020년 개항을 목표로 ‘흑산공항’ 건설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흑산도의 북동쪽인 예리 지역에 1.2㎞ 길이의 활주로를 만들면 50인승 항공기 이착륙이 가능해진다. 서울에서 차량과 쾌속선으로 7시간 이상 소요되는 흑산도 가는 길이 1시간대로 줄지만, 철새 보호 필요성이 커졌다.

흑산도는 전체 면적이 19.7㎢에 달하는 비교적 큰 섬이다. 흑산공항은 이 섬의 북동쪽 끝인 흑산면 예리 68만㎡(0.68㎢) 부지에 건설될 예정이다. 공항 건설 공사에 따른 철새 피해 우려가 큰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먹이 활동에 지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섬 곳곳에서 주민들이 모이용 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흑산도 철새전시관 내 멧새류 철새 조각들. 흑산도를 가장 많이 찾는 종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흑산도 철새전시관 내 멧새류 철새 조각들. 흑산도를 가장 많이 찾는 종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신안군은 생물 다양성 관리 계약 사업으로 철새를 위한 농사를 지을 주민들을 모집했다. 진리 1구와 2구, 사리, 심리 등 20명의 주민이 25필지에서 ㎡당 1560원을 받기로 하고 지난 7월 조를 심었다. 총 3만2299㎡(약 9770평) 규모다. 흑산공항 예정 부지를 제외한 흑산도 곳곳에 철새들이 먹이활동을 할 수 있는 조밭이 조성된 것이다.

주민들은 이달 말부터 다음날 초 사이 이뤄질 수확을 위해 조 농사에 구슬땀을 쏟고 있다. 농사 현황을 중간 점검받은 뒤 우선 약속한 금액의 70%를 받을 예정이다. 또 농사가 완전히 마무리 되면 나머지 금액도 수령한다.

신안군청과 계약을 맺고 흑산도 사리에서 철새를 위한 조 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이 농사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신안군청과 계약을 맺고 흑산도 사리에서 철새를 위한 조 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이 농사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조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가을철 밭의 절반 면적만 수확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둬야 한다. 이 무렵 월동지로 날아가기 위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철새들이 쉬어가며 배를 채울 먹이를 남겨 두는 것이다. 가을에 수확한 조는 보관해뒀다가 봄철에 방문하는 철새들을 위해 밭에 뿌려주게 된다. 조밭에 농약 살포는 금지된다.

난생 처음 동물을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한 흑산도 주민들은 섬의 또 다른 주인인 철새들과의 공존 실험에 의미를 부여하며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으며 철새를 위한 활동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흑산도 사리 박현용(42) 이장은 “조 농사는 약초 등 다른 작물에 비해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작물이어서 어르신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흑산공항 추진 예정 부지. 철새들의 쉼터 보장과 먹이 활동을 위해 섬 곳곳에서 조 농사를 짓고 있다. [사진 구글 지도 캡쳐]

흑산공항 추진 예정 부지. 철새들의 쉼터 보장과 먹이 활동을 위해 섬 곳곳에서 조 농사를 짓고 있다. [사진 구글 지도 캡쳐]

신안군은 올해 처음으로 흑산도에서 실시되는 생물 다양성 관리 계약 사업의 결과를 지켜본 뒤 계약 농사 면적과 작물 종류를 늘려가기로 했다.
국립공원연구원 박종길 철새연구센터장은 "흑산도에 휴경지가 늘어 철새들의 먹이 활동에 어려움이 생기는 상황에서 이번 사업으로 먹이 공급원이 증가하면서 철새들의 건강 상태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흑산도=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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