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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 '금발'을 만드는 손, 나는 구두장이 유오상입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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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일하십니까?"

뻔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야 물론 돈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밥벌이 때문에 일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구두닦이·사육사·버스기사…. 평범한 우리 이웃 14명의 입을 통해 우리가 진짜 일하는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직업의 정석: 당신은 왜 일하는가' 아홉번 째 주인공은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의 스케이트 화를 만드는 유오상 삼덕스포츠 대표입니다. / 특별취재팀


유오상 씨는 어른 무릎 높이보다 낮은 작업대 앞에서 스케이트화를 만든다. 그는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46년 동안 신발가죽을 꿰맸다. 이 작업대에서 한달에딱 네켤레 스케이트화가 만들어진다. 우상조 기자

유오상 씨는 어른 무릎 높이보다 낮은 작업대 앞에서 스케이트화를 만든다. 그는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46년 동안 신발가죽을 꿰맸다. 이 작업대에서 한달에딱 네켤레 스케이트화가 만들어진다. 우상조 기자

40대 후반의 최 모 씨 부부는 아침부터 대전에서 2시간을 달려왔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큰아들과 유치원 다니는 둘째 아들에게 스케이트 화를 맞춰주기 위해서다. “심석희 선수 스케이트 화처럼 해주세요.” 발 모양 본을 뜨던 큰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요!” 곁에 있던 동생도 질세라 외쳤다. 한껏 신이 난 아이들 손을 잡고 부부가 사라지자, 건장한 청년이 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의 이종우(37) 선수였다. 취재진을 본 그는 부끄러운 듯 스케이트 화 수선을 부탁하고 돌아갔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삼덕스포츠.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스케이트 화를 맞추러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47년째 스케이트 화만을 만들고 있는 '구두장인' 유오상(66) 대표에게 발을 맡긴다. 그의 손에서 태어나는 선수용 스케이트 화는 많아야 한 달에 4켤레. 지난달 26일 만난 유 대표는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일하다 보니, 등은 굽고 검버섯은 손등까지 내려왔다"며 밝게 웃었다.

인터뷰 도중 손님이 찾아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새벽부터 대전에서 달려온 꼬마 손님과 부부였다. 유오상(오른쪽) 삼덕스포츠 대표가 발모양 기록을 위해 사진 촬영하고 있다.우상조 기자

인터뷰 도중 손님이 찾아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새벽부터 대전에서 달려온 꼬마 손님과 부부였다. 유오상(오른쪽) 삼덕스포츠 대표가 발모양 기록을 위해 사진 촬영하고 있다.우상조 기자

달큰한 단팥의 기억

유 대표의 아버지는 북한 평안북도 출신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며 남으로 피난을 왔다. 전쟁이 끝나고 빵공장을 열었고, 충남 천안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 2남1녀를 뒀다. 1951년 빵공장집 장남으로 태어난 유 대표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아버지의 옷자락에선 늘 달큰한 단팥 냄새가 났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돈을 관리할 줄을 몰랐다. 담배를 걸고 시작한 마작으로 가산을 탕진했다. 장남인 유 대표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19살이 되자마자 서울 동대문운동장 앞에 있는 동화운동구점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축구화·농구화… 스포츠화란 스포츠화는 다 만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배웠다. 패턴 만들기부터 봉제까지 신발 만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익혔다. 일이 재미있어 밤마다 공장에 남아 혼자 연습을 했다. 쪼가리 가죽으로 미니어처 스포츠화를 만들었다. “원래 뭐든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만들고 나면 ‘손재주 있다’며 손님들이 좋아해주니 재미있었죠.”

1년 뒤 직장을 옮겼는데 역시 스포츠화를 만드는 형제체육화란 곳이었다. 신발 만드는 전 과정을 익힌 덕에 어린 나이에 20명의 직원을 부리는 공장장이 됐다. 4년을 일하고 다른 스포츠화 공장장으로 이직을 했는데, 1995년 회사가 부도났다. 오랜 알고 지내던 거래처 사람들은 그에게 “회사를 차리면 보증을 서주겠다”고 권했다.

그의 작업실 바깥에 줄 서있는 스케이트화들. 마무리 작업이 끝나면 이곳을 떠난다. 자식 다루듯 스케이트화를 어루만지는 유오상(사진) 씨의 손에 오랜 시간의 흔적들이 피어있다. 우상조 기자

그의 작업실 바깥에 줄 서있는 스케이트화들. 마무리 작업이 끝나면 이곳을 떠난다. 자식 다루듯 스케이트화를 어루만지는 유오상(사진) 씨의 손에 오랜 시간의 흔적들이 피어있다. 우상조 기자

김동성 선수와의 인연

유 대표는 부도난 회사의 기계를 넘겨받으며 회사를 차렸다. ‘기술·사람·신용을 지키자’는 뜻에서 이름을 삼덕(三德)스포츠라고 지었다.

회사를 차리고 일년 뒤. 당시 쇼트트랙 간판선수인 김동성(37)이 찾아왔다. 스케이트 화가 맞지 않아 발이 아프니 손을 봐달라는 것이었다. 들고온 제품은 일본 회사 것이었다. “보통 스케이트 화는 가죽이거나 양조피혁으로 만드는데 그 스케이트 화는 특이하게 섬유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김동성 선수에게 물었죠. ‘이거 내가 만들면 쓸거냐’고요.”

그는 밤낮 없이 연구를 했다. 문제의 섬유가 강철보다도 강한 탄소섬유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결국 그가 스케이트 화를 직접 만들어내자 거래처에서 ‘투자금을 대겠다’고 나섰다. 그는 “기술만보고 선뜻 선결제를 해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니 어리둥절했어요. 그 분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좋은 제품만 만들어달라’고요. 그게 큰 힘이 됐어요.”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1000m 남자 쇼트트랙 경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2위로 달리던 김동성 선수가 결승점에서 앞서 달리던 중국 선수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금메달을 딴 것이었다. 그때 김 선수가 신고 있던 게 유 대표의 스케이트 화였다. 이후 국내 간판 선수들이 하나 둘 그가 만든 스케이트 화를 찾기 시작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 때는 쇼트트랙 메달리스트의 절반이 그가 만든 신발을 신었다.

삼덕스포츠 사무실의 철문을 열고 발을 한발짝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감사 편지. 일본 국가대표선수단과 중국 국가대표선수단이 마음을 담아 보낸 것들이다. 우상조 기자

삼덕스포츠 사무실의 철문을 열고 발을 한발짝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감사 편지. 일본 국가대표선수단과 중국 국가대표선수단이 마음을 담아 보낸 것들이다. 우상조 기자

유 대표를 찾는 고객 가운데는 외국 선수들도 많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 김동성 선수와 일합을 겨뤘던 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1500m 경기에서 김동성은 앞서 달리던 오노를 제치고 먼저 경승전을 통과했다. 하지만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실격처리를 받았다. 이 사건은 ‘희대의 오심’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유 대표는 오노의 스케이트 화를 만들 때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

“저는 선수들의 발목을 편안하고 푸근하게 잡아주는 신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발목 부분이 딱딱하면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거든요. 안현수 선수나 김동성 선수는 발목을 잘 쓰니까 코너를 돌 때도 중심이동이 좋잖아요. 한데 오노 선수는 달랐어요. ‘파워 스케이팅’을 하겠다고 발목 부분을 강하게 잡아주는 신발을 고집했죠. ”

결국 오노는 그가 만들어 보낸 스케이트 화가 딱딱하지 않다고 돌려보냈다.

2002년 솔트레이크올림픽 쇼트트랙 결승전에서 '할리우드액션'으로 한국의 김동성 선수를 실격시켰던 미국 안톤 오노 선수의 스케이트화. 그는 유오상씨가 만들어준 스케이트화가 딱딱하지 않다며 되돌려보냈다. 당시 판정은 희대의 오심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우상조 기자

2002년 솔트레이크올림픽 쇼트트랙 결승전에서 '할리우드액션'으로 한국의 김동성 선수를 실격시켰던 미국 안톤 오노 선수의 스케이트화. 그는 유오상씨가 만들어준 스케이트화가 딱딱하지 않다며 되돌려보냈다. 당시 판정은 희대의 오심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북으로 보낸 신발 스무켤레
올초의 일이다. 일본에서 열린 삿포로 겨울 아시아 쇼트트랙 경기에 북한 대표팀이 참가했다. 경기에 앞서 북한 선수들의 훈련을 살펴보던 한국 대표팀은 깜짝 놀랐다. 북한 선수들 발에 삼덕스포츠의 스케이트 화가 신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유대표의 귀에도 소식이 전해 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 '평화삼천리'라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남북교류 차원에서 북한 선수들 스케이트 화를 만들어 전해주자는 제안을 받았죠. 체육용품 지원 품목 중에 스케이트 화가 있었던 거죠. 모두 20켤레를 만들었어요."

아버지의 고향, 북한으로 신발을 보내며 그는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발 모양을 본떠 신발을 만들어야 하는데, 분단이 돼 있으니 북한 선수들을 만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머리 속으로만 생각해 제품을 만들었죠." 그 후 십수년이 지났는데 북한 선수들이 아직도 그 신발을 신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웠다.

"북한 경제 사정이 열악하니 내 신발을 경기 때만 신는 것 같아요. 너무 오래돼서 신발에 들어간 완충제도 다 망가졌을텐데. 발도 많이 아플텐데. 아마 아픈걸 참고 타는 걸거예요. 수선이라도 해주면 제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아요."

'이번 올림픽만, 이번 올림픽만.' 힘들 때마다 올림픽을 목표로 인생을 거는 선수들을 생각했다. 올초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그는 지금 내년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되뇌인다. 우상조 기자

'이번 올림픽만, 이번 올림픽만.' 힘들 때마다 올림픽을 목표로 인생을 거는 선수들을 생각했다. 올초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그는 지금 내년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되뇌인다. 우상조 기자

최순실이 던진 돌

삼덕스포츠 작업장 겸 사무실 한켠에는 스케이트 화가 가득 담긴 박스가 있다. “이렇게 쌓여있으면 안 되는 건데….” 유 대표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만든 수제화는 한 켤레에 기백만원씩 한다. 요즘 넘쳐나는 값싼 중국산을 이기기 힘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며 손님 발걸음이 더 줄었다. 승마선수였던 정유라 탓에 체육특기생들의 학사관리가 깐깐해진 영향이다. 스케이트 선수를 꿈꾸는 학생들이 대회 나가는 게 쉽지 않아졌고, 부모들은 고가의 수제화 사기를 꺼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작업장이 북적북적 했어요. 소규모여도 스케이트 화 만드는 곳이 국내에 10여 개 있었는데 이젠 절반도 남아있질 않아요.”

선수들의 발 사이즈를 잰 노트를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계속 할 거에요. 이 문 열고 들어오는 선수들이 있는 한, 끝까지요.”

특별취재팀=김현예·정선언·정원엽 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디자인 김은교, 영상 조수진,개발 전기환·원나연 hykim@joongang.co.kr

나는 왜 일하는가

선수들이 발목을 어떻게 사용하고, 코너를 어떻게 도는지 연구하려고 사진을 찍어요. 사진을 찍으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었어요. 선수들이 결승점에 도달할 때 쯤, 얼굴이 평상시와 다르게 기묘하게 일그러져요. 0.01초를 앞당기려고 온힘을 쏟아붓기 때문이예요. 그 찰나의 순간, 정말 바닥부터 힘을 끌어올리다보니 애절한 표정이 나오는 거죠. ‘아, 저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을 참고 준비하는 거구나’ 싶었어요.

제가 하는 일은 선수들의 발을 재고, 석고틀을 만들어 모양에 맞게 깎고, 가죽을 재단해 이어붙이는 거예요. 일 자체를 보면 하루 종일 작업대 앞에 쭈그려 앉아 하는 거니 힘들지요. 너무 힘드니까 다음 올림픽까지만 하자, 다음 올림픽까지만 하자 하며 버텼어요.

근데 사실은 재미있어서 일 하는 것 같아요. 일을 하니 돈을 벌 수 있고요, 선수들이 찾아와 ‘경기력이 좋아졌다’고 하면 그게 참 보람있어요. 요즘 친구들, 직업을 선택할 때 돈만 벌려 드는 경향이 있잖아요. 내가 무엇을 해야 재미있을까를 먼저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돈이 따라오거든요. 돈만 봤으면 저도 회사를 그만뒀을지 모르겠어요. 외국 스포츠 용품 회사에서 기술을 팔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운동 선수들은 세계 최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독일 국가대표가 일부러 신발을 맞추러 저를 찾아와요. 앞으로도 이런 선수들이 앞다퉈 찾아오는 곳으로 만들자,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해요. 욕심내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갈 겁니다.

유오상씨가 처음으로 만든 스케이트화. 그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듯 스케이트화 하나하나를 꺼내보이며 이 신발을 신었던 선수들과 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상조 기자

유오상씨가 처음으로 만든 스케이트화. 그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듯 스케이트화 하나하나를 꺼내보이며 이 신발을 신었던 선수들과 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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