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서 터져나온 첫 마디 "진짜 설경구 맞아?"

중앙일보

입력 2017.08.31 09:39

올해로 쉰 살이 된 배우 설경구. 무심한 듯한 표정은 작품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사진 쇼박스]

올해로 쉰 살이 된 배우 설경구. 무심한 듯한 표정은 작품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사진 쇼박스]

배우 설경구(50)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전제로 한다. 검증된 연기파 배우에 대한 믿고 보는 신뢰감과 이번엔 또 어떤 변신으로 뒤통수를 칠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는 7일 개봉을 앞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원신연 감독)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얼굴 중 가장 건조하면서도 섬뜩한 모습에 해당한다.

7일 개봉하는 김영하 원작 소설 모티브 영화서
알츠하이머 앓는 전직 연쇄살인범으로 변신
10kg 감량으로 특수분장 없이 노인 연기 성공
"배우가 고통스러울스록 관객 즐거움 커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맡은 김병수 역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이자 17년 전 은퇴한 연쇄살인범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수분장도 없이 10kg 체중감량과 기름기를 걷어낸 표정으로 노인의 얼굴을 빚어냈다.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하얗게 센 머리와 경미한 안면 경련을 일으키며 나타난 그의 모습에 몰입하게 된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노인으로 분한 모습은 '진짜 설경구 맞아?'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사진 쇼박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노인으로 분한 모습은 '진짜 설경구 맞아?'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사진 쇼박스]

서울 팔판동에서 만난 설경구는 “노인 분장을 안 해봤으면 모를까 불과 몇 년 전에 했던 걸 또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나의 독재자’(2014)’에서 매일 5시간의 특수분장을 통해 70세의 김일성 대역을 연기하고, 18kg을 감량한 ‘오아시스’(2002)부터 28kg을 찌운 ‘역도산’(2004)까지 몸만들기에는 이력이 난 그답게 “이번엔 한 번 늙어보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다. 그는 매일 촬영 직전 2시간씩 줄넘기를 하고 탄수화물은 물론 수분까지 조절하면서 병수가 되어갔다. 그는 “‘오아시스’ 이후 꾸준히 줄넘기를 한다”며 “날씨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좁은 방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베니스나 칸에도 들고 가고 오늘 아침에도 하고 나왔다”며 줄넘기 예찬론을 펼쳤다.

사실 그가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에 그려진 병수의 모습이었다. 그는 “원래는 원작을 읽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 너무 궁금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단숨에 다 읽었는데 감독은 병수를 50대 후반으로 설정했더라고요. 하지만 요즘 50대는 청년이잖아요. 그래서 최소 60세 이상으로는 보여야겠다 싶었죠. 쾌감을 위해 살인을 하는 원작의 캐릭터와 죽어 마땅한 사람을 청소하는 명분으로 하는 영화 속 캐릭터는 전혀 다른 사람에 가까웠지만 상통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다른 하나는 치열함에 대한 회복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송강호와 누적관객 수 1, 2위를 다투던 그는 ‘공공의 적 2013’ 이후 이렇다할 흥행작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오달수 씨가 배우가 더 고민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워할 때 관객은 더 즐거워하고 입체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데 아차 싶었다”며 “한동안 별다른 고민없이 작품에 임했는데 고민에 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밝혔다. 공허함과 매너리즘에 휩싸였을 때 만난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큰 산을 넘는 데 성공한 셈이다.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팽팽하게 대립한다.[사진 쇼박스]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들은 영화 속에서 팽팽하게 대립한다.[사진 쇼박스]

덕분에 극은 더욱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극중 그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기억을 붙들어야 할 이유인 딸 은희 역의 설현에 대해서는 애틋함을 더하고, 자신과 같은 연쇄살인범의 눈빛을 가진 경찰 민태주 역의 김남길과는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의 대비를 이룬다. 안 형사 역을 맡은 오달수까지 모두 원작을 모티브로 영화 속에서 재창조된 인물이다. 누군가는 더 짙어지고 누군가는 더 옅어지는 농담의 변화는 있지만 설경구는 이들 모두를 능숙하게 한 점으로 모은다.

일기 형태의 내레이션은 설경구 특유의 저음과 맞물려 “소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해낸다. “살인이 시라면 육아는 산문이다” 같은 대사는 김영하식 블랙 유머의 토양에 감독의 기발함과 배우의 시니컬함이 더해져야 탄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다. 2013년 출간 후 책을 읽자마자 영화화를 결심했다는 원 감독의 원작에 대한 애정과 ‘용의자’(2013) ‘세븐 데이즈’(2007) 등 스릴러도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뚝심의 결과이기도 하다.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는 영화 '불한당' 속 건달 한재호의 모습이 남아있다. [사진 쇼박스]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는 영화 '불한당' 속 건달 한재호의 모습이 남아있다. [사진 쇼박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일기와 녹음으로 대변되는 기록과 그가 수의사이자 살인자로 살아온 기억, 태주가 범인일 것이라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한 상상과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망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자 헷갈리게 하는 장애물이다. 설경구는 “교통사고 장면을 비롯해 몇몇 장면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 여러 버전으로 찍었다. 이후 편집을 통해 완성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알츠하이머를 실제로 겪은 사람의 증언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로 다큐멘터리 등을 참고해 모든 장면을 실제라고 생각하고 찍었다”며 “결말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그는 영화 속에서 잘 빠져나온 듯 후련해 보였다. 지난 5월 먼저 개봉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등 2편의 영화를 연달아 찍으면서 겪은 신기한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불한당’은 누적 관객 수는 채 100만 명이 되지 않았지만 열혈팬을 자처하는 ‘불한당원’들이 자발적 대관으로 상영을 이어가는 등 남다른 인기를 누린 것. “극장에 들어서는데 귀청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제가 언제 그런 함성 소리를 들어봤겠어요. 그게 어떤 동력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감사할 따름이죠. 앞으로 더 치열하게 더 달라진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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