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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 사건의 악연…원세훈 선고 하루 전 변호사 개업한 채동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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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29일 법무법인 서평을 설립하고 변호사로서 새출발했다. 채 전 총장이 개소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29일 법무법인 서평을 설립하고 변호사로서 새출발했다. 채 전 총장이 개소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제가 검사 생활을 하며 악(惡)을 응징했듯이,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더라도 악의 편을 들진 말자. 힘 없고 돈이 없는 어려운 분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자는 다짐을 합니다.”

법무법인 서평 개소식 29일 열려 #검찰 동료 이재순, 임수빈과 한솥밥 #"지난 4년간 가슴 찢어지는 아픔"

29일 오후 7시 서울 내곡동의 ‘법무법인 서평’ 개소식에서 채동욱(58) 전 검찰총장이 입을 열었다. 그는 지난 2013년 4월 제39대 검찰총장에 올랐지만 혼외자 의혹이 불거지면서 6개월 만에 사퇴했다. 지난 1월 변호사 등록을 마친 채 전 총장은 4년 만에 ‘변호사 채동욱’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채 전 총장은 이날 개소식에서 검찰총장 사퇴 이후의 심경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참으로 많은, 찢어지는 가슴 아픔을 맛 보았다. 많은 괴로움과 함께 가족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발언 도중 감정이 북받치는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낮은 곳에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다”고 발언을 마무리했다.

법무법인 서평엔 채 전 총장과 뜻을 같이 하는 변호사들이 모였다. 1995년 ‘12.12ㆍ5.18 특별수사팀’에서 채 전 총장과 호흡을 맞춘 옛 동료들이 합류했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사정비서관과 대전지검 천안지청장을 지낸 이재순(58) 변호사와 광우병 사태를 보도한 MBC PD수첩 제작진의 기소를 놓고 수뇌부와 갈등을 빚고 검찰을 떠난 임수빈(56) 전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이다. 이 변호사는 채 전 총장의 대학동기고, 임 변호사는 2006년~2007년 대검찰청에서 채 전 총장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채 전 총장은 최근 검찰과 국정원이 재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정원 댓글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는 문제로 청와대와 충돌했다. 그가 검찰총장 자리에서 버틸 수 없게 된 배경이 된 사건이다. 그의 개인 신상이 공개돼 검찰을 떠나게 된 것이 국정원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법조계와 정치권의 해석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개소식 하루 뒤인 30일은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파기환송심 선고일이다. 정면으로 대립해 부침이 엇갈렸던 채 전 총장과 원 전 원장은 하루 간격으로 다시 시작과 끝의 자리에 서는 악연을 이어가게 됐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왼쪽)이 개소식을 찾은 최환 전 서울중앙지검장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김춘식 기자

채동욱 전 검찰총장(왼쪽)이 개소식을 찾은 최환 전 서울중앙지검장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김춘식 기자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사건 처리를 놓고 이명박 정부의 검찰 수뇌부와 부딪힌 뒤 검찰을 떠났던 임수빈 변호사 역시 최근 화려한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다. 그는 박상기 법무부 장관 체제에서 출범한 법무·검찰 개혁위원회의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검찰 개혁의 최일선에 서게 된 임 변호사는 최근『검사는 문관이다』는 책을 출간했다. 문재인 정부와 연결되는 그의 가족 관계도 화제를 모았다. 그의 부인이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사촌간이며, 장인은 김대중 정부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 전 의원이다.

임 변호사는 자신의 책에서 검찰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인권옹호기관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살인검을 휘두르는 검찰’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권력을 지향하거나 권력의 눈치를 보며 칼을 잘못 휘두른 탓이다. 검사는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어야 한다. 검사의 기본 업무는 칼잡이가 아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인권을 보장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적법 절차를 준수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다.”

“칼잡이 검사의 시대는 끝났다”는 그의 주장은 향후 검찰 개혁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한솥밥’을 먹게 된 임 변호사와 채 전 총장이 향후 검찰 개혁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적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법무법인 서평에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출신의 조용연 변호사와 부산지검 형사5부장 출신의 정용진 변호사 등이 함께 일한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기소하는 성과를 올린 특별수사팀을 이끌었던 최환(75) 전 서울중앙지검장도 이날 개소식에 참석했다. 그는 “예전 동료들의 새출발을 지켜보니 감회가 새롭다. 정의로운 법무법인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치권 인사들도 개소식에 참석햇다.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과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 등 정치인들과 동료 법조인들로 북적였다. 권 의원은 국정원 댓글사건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초기 수사를 담당하다가 경찰 상부의 수사 개입 의혹을 폭로했다.

‘채동욱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김윤상(48) 변호사도 개소식을 찾았다. 그는 대검 감찰1과장 재직 당시 채 전 총장이 사퇴하자 항의의 표시로 동반 사표를 냈다. 검찰 내부통신망인 이프로스에 “본연의 업무에 관해 총장을 보필하지 못했다. 채동욱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을 긍지로 삼고 살아가는 게 낫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사법연수원 18기 문무일’이라는 글귀가 적힌 화환을 보냈다. 아내 양경옥(58)씨도 채 전 총장 곁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자신의 사무실 앞에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6월 2일자 30면)를 걸어뒀다.김춘식 기자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자신의 사무실 앞에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6월 2일자 30면)를 걸어뒀다.김춘식 기자

10평 남짓한 채 전 총장의 변호사 사무실의 한켠에는 검찰총장 재직 당시 사용했던 명패가 놓여 있었다. 벽엔 자신이 직접 그린 풍경화 세점을 걸었다. 고교 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던 채 전 총장은 4년의 휴식 시간에 놓았던 붓을 잡았다.지난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아트엑스포 뉴욕’(ARTEXPO NEWYORK)에 작품을 출품하며 정식 화가로 등단했고 실제로 그림이 판매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그가 좋아하는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만의 이름을 이용한 ‘더스틴 채(Dustin Chae)’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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