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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과시적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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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이노베이션 랩장

김창규 이노베이션 랩장

10년 전 아모레퍼시픽은 시장에 없던 새로운 화장품을 선보였다. 액체로 된 내용물(선블록·파운데이션 등)을 머금은 스펀지가 용기에 담겨 있는 ‘쿠션’이었다. 이 제품은 편리하고 효과적이라는 입소문을 타며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내용물을 퍼프로 찍어 간편하게 바를 수 있는 데다 쿠션 하나만 사용해도 여러 개의 화장품을 바른 효과가 나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절반가량 줄어들기 때문이다. 폭발적 인기에 국내외 경쟁업체가 따라 하기에 나섰다. 올 6월에는 프랑스 명품업체 샤넬이 쿠션을 내놓는 등 로레알·엘카·시세이도·LVMH 세계 4대 화장품 그룹이 모두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제 쿠션은 전 세계 여성에게 익숙한 카테고리가 됐다.

얼마 전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 제품을 내놓기 힘들다고 푸념했다. 새로운 걸 선보이면 바로 경쟁업체에서 따라 하니 차별화가 쉽지 않다고 했다. 얼굴을 찌푸린 그에게 물었다. 그럼 반대로 경쟁업체가 눈길 끌 만한 제품을 내놓을 땐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그러자 그는 “효과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면 도입할 수밖에 없지 않냐”며 말끝을 흐렸다. 경쟁자의 베끼기를 불평하지만 결국 자신도 경쟁자를 따라 하고 있었다.

‘Be different or die!’ 차별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뜻의 이 말은 기업 하는 사람에게 강박관념처럼 따라붙는 생각이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기업마다 차별화를 외치지만 이들이 내놓은 제품은 점점 더 비슷해진다. 이런 현상은 경쟁이 치열한 업종일수록 두드러진다. 경쟁이 심하다 보니 상대방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신경 쓰며 서로 따라 하게 되고 결국 소비자는 제품 간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 이는 식품·통신·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급해진 기업은 경쟁 업체와 비교해 가며 제품의 작은 차이를 부각하려 하지만 소비자에겐 그저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느껴질 뿐이다. 문영미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를 ‘과시적 경쟁’이라고 진단했다. 주변 사람에게 보이거나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소비를 하는 것(베블런의 과시적 소비)처럼 상당수 기업이 경쟁자를 따라잡는 데 많은 시간을 쓰면서 원래 목표(차별화)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철새는 무리를 지어 질서정연하게 날아간다. 주위의 새와 일정 간격을 두고 비슷한 속도로 날아가는 철새처럼 상당수 기업이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면 차별화나 혁신은 어렵다. 당장은 외롭겠지만 무리에서 떨어져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할 때 진정한 의미의 차별화가 시작된다. 배송 안 해주고 손수 조립해야 하는 가구를 파는 이케아나 신발 뒷부분에 바퀴를 달아 롤러스케이트처럼 타고 다니게 한 힐리스처럼.

김창규 이노베이션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