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픈 더 도어(Open the door), 문을 열어라!”
데뷔 60주년, 해외공연 나선 #사물놀이 아버지 김덕수
공연장의 무대만 바라보던 관객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쳐다봤다. 연주자들이 관객용 출입문을 통해 객석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여러분 앞으로 복 몰고 들어갑니다”라는 외침과 동시에 태평소를 선두로 한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의 첫 머리인 ‘문 굿’이 지난달 23일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의 콘서트홀(칸가에브 돔)에서 시작됐다. 한창 여름 휴가철인데도 400석 규모의 공연장은 만석이었다.
네 가지 악기, 북ㆍ장구ㆍ꽹과리ㆍ징 소리가 무대와 객석을 순식간에 채웠다. 무아지경의 소리 잔치였다. 즉흥적이면서 신들린 듯 합이 맞는 타악기 가락이 듣는 이의 가슴을 옥좼다 풀어헤치기를 반복했다. 곡예 수준의 상모돌리기에 숨죽이던 관객들은 2시간여의 공연이 끝나자 오래도록 기립박수를 보냈다. 한국-슬로베니아 수교 25주년 기념 공연이자, 올해 데뷔 60주년을 맞은 김덕수(65)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해외 순회공연 첫 현장이었다. “데뷔 이래 공연이든 시위든 현장의 ‘앞잡이’로 살아왔다”는 그를 현지에서 만났다.

예인(藝人) 인생 60주년을 기념한 김덕수 패거리의 해외 공연 여정은 한 달이 넘게 이어졌다. 류블랴나를 거쳐 빈(오스트리아)ㆍ부다페스트(헝가리)ㆍ베를린(독일)ㆍ함부르크(독일)ㆍ스톡홀름(스웨덴)ㆍ이탈리아ㆍ사할린(러시아)을 도는 일정이었다. 60년 전 그의 첫 데뷔 무대는 시골 장터였다. 1957년 당시 다섯 살이던 김씨는 아버지를 따라 충남 조치원 난장(亂場)에서 데뷔했다. 아홉 남매 중 여섯째인 그를 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광대로 점찍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남사당 예인이었던 아버지는 자식 중 한 명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어했다. 난장판에서 무동(舞童)으로 데뷔한 그는 “첫 날부터 어른들과 똑같이 개런티를 받으며” 재주를 넘었다. 데뷔 때부터 프로였고, 그 정신이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했다. 남사당패 어른들에게 밀리지 않았던 ‘자존심’이었다.

이단아 소리도 들었지만, 살려면 변화해야 했다
일곱 살에 전국 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받았고, 숱한 선생들에게 사사받으며 “국악 천재”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큰 전환기는 78년 옛 공간 사옥 소극장에서의 공연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사물놀이’를 처음 선보였다. 관악기를 제외하고 북ㆍ장구ㆍ꽹과리ㆍ징, 타악기 넷 만으로 우리 전통 가락을 구현해냈다. 물론 호평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 ‘전통이 아니다’는 시선도 있지 않았나.
- “왜 없었겠나. 첫 연주 때 ‘미친 놈’ ‘이단아’ 라는 소리도 들었다. 어떤 평론가는 ‘전통을 부수는 행위’라고도 평가했다. 사실 우리 전통 공연예술은 오래동안 변화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해야 한다고 본다. 60년대부터 전통문화예술의 위기가 찾아왔다. 우리 마당이 사라지고 전통의 농악판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70년대에는 데모의 앞잡이로 몰려 풍물 연주를 금지당했다. 판이 없어졌으니, 판을 만들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대열을 추스려 극장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 왜 사물인가.
- “새롭게 만든 것도 특별난 것도 아니다. 풍물의 근본 중 근본이다. 과거 마을마다 상여와 장구ㆍ북ㆍ꽹과리ㆍ징을 공동 자산으로 관리했다. 좋은 일이 있어도, 누가 돌아가셔도, 전쟁이 일어나도 네 가지 악기는 필수였다. 바뀐 시대에 맞춰 전통 예술도 변화하되, 본질적인 것을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
- 그게 뭔가.
- “우리 신명이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흥과 한이다. 끊길 듯 끊기지 않는, 둥글게 감기는 무한대의 에너지다. 희한한 것은 언어가 다른 외국인들도 슬픈 노래하면 같이 울고, 즐거운 노래하면 웃는다. 우리 춤을 안 가르쳐줬는데도 ‘덩더꿍’치면 외국인들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우리 가락에 젖다보면 인종과 국적 불문하고 신명을 드러낸다.”
- 사물놀이패 창단 이후 첫 앨범도 미국에서 냈다.
- “83년 미국 뉴욕의 논서치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냈다. 국내에서는 ‘국악은 안 팔린다’며 녹음도 안 해줬다. 그런데 당시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연주를 갔다가 청중들이 즉석 모금을 해줘서 음반을 내게 됐다. 해외에서 먼저 알아줬다. 이후 네 청년이 타악기를 들고 전 세계를 다니기 시작하는데 한국의 마피아라도 된 기분이었다.”
- 재즈 뮤지션과의 협연이 특히 많았는데.
- “해외 재즈뮤지션들이 초창기의 우릴 많이 초청했다. 멜로디가 아니라 리듬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재즈의 전설로 통하는 마일스 데이비스, 오넷 콜먼과도 협연했다. 뉴욕 블루노트 등 슈퍼스타들이 연주하는 세계적인 재즈 클럽을 다 다녔다. 본디 리듬이니 온갖 장르와 접목할 수 있었다. 팝과 EDM은 물론이고 클래식과도 사물놀이는 협연할 수 있다.”
-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나.
- “내가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재밌었다. 다만 공연을 따라다니느라 학교를 거의 다니지 못했다. 초등학교 6년을 다 합쳐서 출석일수가 300일도 안 됐다. 인문 중학교에 가고 싶어서 도망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팔자 탓인지 서울 남산에 있는 국악예술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큰 선생님한테 배우고, 해외 위문 공연도 다니면서 예인으로서 세상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태권도를 롤모델로 한 세계사물놀이협회 만드는 게 꿈”
사물놀이를 창단해 지금껏 국내외 공연 횟수만 5500회가 넘는다. 북한을 포함해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데뷔 이래 가장 행복했던 공연 장소로 어릴적 섰던 ‘난장’을 꼽았다.
“민족적 철학이 있던 곳이죠. 난장을 트려면 물건을 파는 보부상과 광대 역의 남사당패, 동네 유지의 합의가 있어야 했어요. 어려웠던 시절 동네에서 필요한 공공물품을 마련하기 위한 이벤트였죠. 장을 세워서 나오는 수익금을 동네에 기부했어요. 서양에 광장 문화가 있다면 우리한테는 난장 문화가 있었던 거죠.”
한 때 광대라고 천대받기도 했지만 20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전통연희과를 만들며 우리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어엿한 교수가 됐다. 이후 사라지는 우리 유산을 교육적으로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데 매진했다. 그는 “20년간 교재 10권을 썼다”고 말했다. 그 덕에 사물놀이로 논문을 쓴 석ㆍ박사도 나오고 외국인 제자도 숱하게 많아졌다. 사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란 뜻의 ‘사물노리안(Samulnorian)’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사물놀이를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 데 앞장섰지만, 그는 섭섭한 속내를 내비쳤다.
“아직도 꽹과리 소리가 나면 마귀 소리라고, 미신이라고 편견을 가져요. 선교사들이 해외로 나갈 때 한국의 전통문화로 우리 사물놀이를 배워 나가면서도 그래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관혼상제가 없어지고 우리 생활문화도 사라졌어요. 우리 것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경시하게 됐죠. 클래식 지휘자는 마에스트로라고 하지만, 국악의 지휘자는 어디 그렇게 부르나요.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요즘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태권도를 롤모델로 한 세계사물놀이협회를 만들려고 한다”고 전했다. “세계음악교육 시장의 주류로 자리잡기 위해 쓰러지기 전까지 매진하겠다”고도 했다. 그는 다음달 21일 KBS국악관현악단과 예인인생 60주년을 기념한 콘서트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연다. 11월 초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우리 가락같은, 끊길듯 끊기지 않는 둥글게 감기는 무한대의 에너지가 그에게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
류블랴나(슬로베니아)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주오스트리아대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