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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있어 오르듯 베토벤을 거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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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06면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소나타 곡 수는 총 32개다. 1794년 만 스물넷에 소나타 1번을 썼고, 1822년 쉰둘에 32번을 완성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위해선 통시적인 이해뿐 아니라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중반의 맥락을 현대적으로 재생할 공시적인 시야가 필수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신뢰할 만한 중년 음악가가 “베토벤이 다시 보인다”고 할 땐, 보통 악성(樂聖)에 영향을 주거나 받은 작곡가를 탐구하면서 베토벤의 진가를 다시 봤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중반의 아르투르 슈나벨, 빌헬름 켐프부터 2000년대 안드라스 쉬프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건반 주자들이 중년의 마감과 노년의 시작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로 보냈다.

1946년생 백건우가 9월 1일부터 8일까지(3일 2회 공연, 4일 휴식)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전집과 마주한다. 2007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프로그램을 연주했지만, 칠순의 거장은 이번 연주회가 ‘재도전’의 틀로 비치는 걸 경계한다. 정복욕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하려는 게 아니라, 산이 거기 있기에 그냥 오르듯, 베토벤을 거닐고자 한다.

백건우는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로 이어지는 독일계 핵심 작곡가를 연구할 때나 드뷔시, 쇤베르크를 조망할 때도 간접적으로 베토벤을 유추했다. 그래서 백건우에게 베토벤은 경외의 대상보다 숨 쉬는 공기 같은 존재다. 훗날 음악사가들은 백건우 시대의 언론이 그를 ‘건반 위의 구도자’로 칭한 연유를 베토벤 전곡의 준비 과정과 업적에서 찾을 것이다.

지난 3월 말 충남 예산을 시작으로 7월 말 부여까지 백건우는 20개 도시를 돌면서 세부 곡목들을 미리 조율했다. 부인 윤정희와 시골 장터를 찾아 그곳 사람들을 지켜보고 시간이 되면 공연장으로 향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주변에서 우려했던 바와 달리 공연 후 체력 회복에 큰 문제는 없었다. 암보로 연주하지 않는 경우에도 악보를 주시하는 눈빛이 명료하다.

2010년대 들어 백건우처럼 서른 두 곡의 자취를 압축적으로 탐구하는 전곡 공연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영국의 1944년생 피아니스트 존 릴은 2013년 10월부터 런던 카도간홀에서 다섯 달에 걸쳐 전곡을 아울렀다. 연주자와 수용자 모두 시간을 두고 베토벤을 탐구하는 방식이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백건우는 스승 빌헬름 켐프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베토벤 전곡에서 대중적 화제작은 ‘월광’‘비창’‘열정’ ‘발트슈타인’과 후기 소나타 3곡(30-32번)이다. 백건우의 마력은 어느 곡에서든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데 있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의 피로도 상당하다. 드라마틱한 부분에선 급류에 모두를 휩쓸리게 하듯 음악에 달려드는 자세가 맹수와 다름없다. 반대로 느린 악장에선 느긋한 서정을 풍부하게 머금게 되는데, 그 결과 알려지지 않은 베토벤 소나타들이 새롭게 빛을 받는다. 백건우는 연대기식이 아니라 베토벤이 단기간에 어떤 발전을 이뤘는지, 곡목 사이의 인과 관계를 체계적으로 관찰한다. 역사서로 치면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방식의 접근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브렌델이 일흔 여섯에 무대에서 내려왔듯이 백건우도 언젠가 은퇴 시점을 밝힐 순간이 올 것이다. 1941년생 아르헤리치, 1942년생 폴리니, 1948년생 미츠코 우치다가 다양한 형태로 현역을 이어가듯이 백건우는 탁월한 신체 조건과 베토벤을 양축으로 건강한 연주를 상당 기간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급작스런 부상이 아니라면 추후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가 재개될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

글 한정호 공연 평론가 imbreeze@naver.com,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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