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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리카와 아야의 서울 산책

4·3사건 영화 ‘백년의 노래’ 보고 나자 낭만보다 아픔으로 다가온 섬 제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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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8면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한국에 유학 오면 하고 싶은 일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방에서 열리는 영화제 참가하기’다. 3월부터 한국 생활을 하면서 전주·부천·제천에서 열린 영화제들을 찾아다니며 그 지방의 맛난 음식을 먹고, 국내외 영화인들과 교류하며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지방 영화제들의 제일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일반 극장에서 보기 힘든 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8월에 열린 제천 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본 ‘백년의 노래’라는 영화도 내게는 아주 특별했다. 인디뮤지션 ‘단편선’이 제주도에 가서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래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런데 단편선은 가이드 역할일 뿐 실제 주인공은 할머니인 것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이야기의 핵심은 ‘4·3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없는 한 여성이 누가 누굴 죽이는지도 모르는 혼란 속에서 남편도 자식도 잃었다. 혼인신고도 못한 채 가족을 잃는 바람에 아무 보상도 못 받았다고 한다. 음악영화제인 만큼 상영 후 단편선이 무대에 나와 직접 노래를 들려줬다. 할머니의 한이 담긴 노래를 들으며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 속에 숨겨진 아픔을 생각했다.

이상목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를 “잊혀 가는 제주의 역사를 노래를 통해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서울 출신이지만 2010년 제주로 이주해 음악영화를 만들며 살고 있다. 어느 관객으로부터 “제주로 이주하는 아티스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게 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막상 제주에 살아보니 동네 나이 드신 분들한테서 “4·3 때 저 밭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요즘 젊은 아티스트들이 이주하면서 제주의 밝은 면이 강조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과거의 아픔을 안고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제주의 현실이다.

요즘 TV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이 인기다. 가수 이효리도 제주로 이주한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자연 속 그의 여유로운 생활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낭만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내가 알고 있던 제주와 너무 달라서일 것이다.

내 고향 오사카에는 재일 한국인이 많이 산다. 특히 제주 출신자와 그 자손이 많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4·3사건 때문에 건너온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 사실을 안 건 영화 ‘지슬’ 때문이다. 제주 사투리로 ‘감자’를 지슬이라고 하는데 4·3사건에 관한 영화다. 2014년 오사카에서 개봉하기 전 4·3사건 관계자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김시종 시인이다. 단편선의 다큐멘터리 ‘백년의 노래’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달리 김 시인은 사건 당사자였다. 남로당 예비 당원으로 활동했다가 학살당할까 봐 일본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자신을 숨겨 주었다가 살해당한 친척, 목숨 걸고 밀항을 도와준 부모님…. 김 시인은 이야기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죄책감의 무게 때문에 오래도록 4·3사건에 관해 침묵했던 그가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다. 내가 취재했을 당시 그는 자서전을 쓰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조선과 일본에 살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대부분이 4·3사건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다.

“왜 지금에서야 모든 걸 밝히는지” 물어봤다. 자신의 증언 때문에 혹시나 피해를 볼 만한 사람들이 이제 세상을 떠났고, 예전에는 밀입국한 것 때문에 일본에서 쫓겨날까 봐 무서웠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설령 쫓겨난다 해도 남은 인생을 제주에서 산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며 웃었다.

이달 말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일본에서 남편과 시부모님이 놀러오는 길이라 처음엔 신나게 관광을 즐길 생각이었는데 4·3사건 기념지도 방문하기로 일정을 수정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동국대 대학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