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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묘도 못 써 죄스러웠는데 … 일장기 말소 81년 되는 날 흉상 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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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아들 이태영이 말하는 ‘내 아버지 이길용 기자’

이태영 체육언론인회 자문위원장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인공인 부친 이길용 기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도 대를 이어 체육 기자로 활동했다. [장진영 기자]

이태영 체육언론인회 자문위원장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인공인 부친 이길용 기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도 대를 이어 체육 기자로 활동했다. [장진영 기자]

81년 전인 1936년 8월 25일.

1936년 8월 25일 일제에 정면 도전 #신문 정간, 해직·옥고 혹독한 탄압 #6·25 때 납북된 뒤 아직 생사 몰라 #대쪽·불꽃이었던 아버지 삶 #“고난에 당당하라”하던 당부 생생 #그 자부심 하나로 힘든 시절 버텨 #손기정 체육공원에 흉상 건립 #“기자가 아니라 지사라 해야 마땅” #손 선생이 생전에 말해 의미 각별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 일본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의 소식을 보도한 신문 기사 속 사진이 문제였다. 주인공 손기정의 가슴팍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어야 할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역사적 이슈다. 서슬 퍼런 일본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행위였던 만큼 무자비한 탄압이 뒤따랐다. 해당 신문사는 즉각 ‘무기한 정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당시 신문사 사회부 체육주임으로 일장기 삭제를 주도한 이길용 기자는 해직과 함께 옥고까지 치렀다.

해방과 함께 복직했지만, 기자로서의 이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6·25 당시 북한이 유명 언론인이던 그를 체포해 강제로 평양에 끌고 갔기 때문이다. 납북 이후 그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아직도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장기가 말소된 손기정의 사진이 게재된 지면. [사진 동아일보]

일장기가 말소된 손기정의 사진이 게재된 지면. [사진 동아일보]

졸지에 가장을 잃은 이길용 기자의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이 기자의 5남1녀 중 3남인 이태영(76·전 중앙일보 섹션국장) 체육언론인회 자문위원장은 “어릴 땐 굶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아버지의 업적을 기억하는 동네 사람들이 이따금 전달한 쌀이나 밀가루로 온 가족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다”며 “그땐 생존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태영 위원장은 또 “학교에 다닐 형편조차 안 됐지만 아버지를 존경한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중·고교(경동 중·고) 6년간 남몰래 학비를 면제받았다”면서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궁핍한 성장 과정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위원장은 부친을 설명하는 단어로 ‘대쪽’과 ‘불꽃’을 꼽았다. 그는 “아버지는 불의에 대한 저항 의식이 선명했고 인내심이 남다른 분이었다”며 “어린 내 손을 잡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고난 앞에 당당하라’고 말씀하시던 표정과 목소리가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또 “자상하거나 가족적인 분은 아니셨다. 월급을 고스란히 집에 가져오신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들었다. 불우한 운동선수들을 돕거나 해외로 원정 가는 선수에게 사비를 털어 지원금을 주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하지만 큰 뜻을 품고 일하시는 걸 알았기에 가족들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자녀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처럼 기자직을 선택했다. 61년 경향신문 기자로 언론에 입문했고, 이후 한국일보를 거쳐 중앙일보에 몸담았다. 그는 “당초 대학 공부에 뜻을 뒀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택했다”며 “공교롭게도 대를 이어 스포츠 기자로 활동하다 보니 아버지의 발자취와 내 모습을 비교하며 쫓아가는 과정이 늘 조급하고 초조했다”고 털어놨다. 이 위원장은 “부친은 체육사(史) 탐구와 자료 발굴 및 수집에 관심이 많으셨다. 집에 방대한 분량의 체육사 관련 자료를 모아두셨는데, 전쟁 때 상당 부분 유실됐다”며 “북한이 아버지를 납치한 건 항일 이력뿐 아니라 한반도 체육역사 전문가로서도 활용가치가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기정 체육공원에 세워진 이길용 기자 흉상. [연합뉴스]

손기정 체육공원에 세워진 이길용 기자 흉상. [연합뉴스]

이길용 기자의 자녀들은 아직까지 아버지의 묘를 쓰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떠났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90년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건국훈장을 수여하며 국립현충원에 묘소를 만들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사망 여부를 알 길이 없어 없던 일이 됐다. 이 위원장은 “국가유공자가 현충원에 안장되려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신체의 일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서 “90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를 비롯해 남과 북이 스포츠로 교류할 때마다 아버지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 위원장은 ‘북한이 납북 인사를 끌고 간 루트’라는 의미에서 한때 ‘납북길’로 불리던 통일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다. 이 위원장은 “어머니의 무덤은 북한과 가장 가까운 임진강 인근 파주에 모셨다. 혹시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영혼으로라도 부부가 재회하길 바라기 때문”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25일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 체육공원에 이길용 기자의 흉상이 세워진 건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길용 기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체육언론인회(회장 이종세)와 체육기자연맹(회장 정희돈)이 뜻을 모아 흉상을 만든 뒤 기념행사를 했다. 조각가 이용철(57)씨가 청동으로 제작한 흉상은 높이 90㎝, 가로 64㎝, 세로 35㎝로 실제 인물의 1.4배 크기다. 이날은 이길용 기자가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한 지 정확히 81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 위원장은 “아버지의 묘를 만들지 못한 불효자로서 늘 마음 한구석에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며 “여러 후배들이 나 대신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흉상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손기정 선생이 살아계실 때 아버지에 대해 ‘그분은 기자가 아니라 지사(志士)로 불려야 마땅한 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와 손 선생은 13세 차이였지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공유하며 서로 존경심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였다”면서 “손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에 아버지의 흉상이 만들어지는 건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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