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수퍼우먼, 너나 하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아침이다. 보육의 ‘ㅂ’ 자도 모르는 남자 사장이 정한 출근 시간은 9시, 어린이집 등원 시간은 8시. 칭얼대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맡기고 헉헉대며 출근하면, 꼭 몇 분 차이로 지각이다. 어린이집 등원 시간 따위엔 관심이 ‘0’인 사장은 종종 말한다. “공부 잘하는 애 비결은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야.” 무능한 아빠들이 지어낸 듯한 이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사장을 보며 생각한다. 등원 시간이 7시30분인 어린이집엔 언제 자리가 나나. 엄마도 소질이 있어야 하는 건가. 좋은 엄마 되는 법 가르쳐주는 학원은 없나. 아, 학원을 갈 시간은 없겠구나.

주위에서 하도 권하기에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훑어봤다. 이게 왜 소설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냥 내 얘기인데? 그럼 지금 내 삶이 소설이라는 건가. 차라리 그러면 좋겠네. 주인공이 남편에게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중략) 애는 오빠 애 아니야?”라고 쏟아붓는 장면. 우리 집에선 매일 밤 벌어지는 실화인걸.

며칠 전이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이었다고 한다. 거의 모든 주요 채널에서 중계를 하길래 ‘대국민 보고대회’라는 걸 봤다. ‘꽃길만 걷게 해줄게’란 노래가 나오더라. 인생이 시궁창인데 어떻게 꽃길만 걷는다는 건지 궁금했지만 피곤에 절어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날 어린이집 정보 취합차 들어간 엄마들 인터넷 카페에선 “엄마와 아빠가 함께 아이를 기를 수 있게 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단연 화제였다. 대다수는 남편의 육아휴직은 꿈도 못 꾼다고 했다. 나도 그중 하나다. 사람들 생각이 바뀌질 않는데 정책은 만들어 뭐하나.

남자도 문제지만 여자도 그렇다. 툭하면 나오는 ‘일과 가정 두 토끼를 다 잡았어요’라는 수퍼우먼들, 솔직해지자. 사실 허세 아닌가. 그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그래놓고 자기만 수퍼우먼이라니, 염치가 없다. 보육과 살림은 그 자체로 책임이 무거운 업(業)이다. 아이가 없는 친구들이 걷고 있는 비자발적 매국의 길이 차라리 꽃길로 보인다. 2분기 합계출산율이 1.04명으로 사상 최저라는데, 그게 무슨 새로운 뉴스라고 호들갑인가. 아이를 낳고 싶은 나라를 만들자는 발상의 대전환이나 했으면 좋겠다. 나더러 해보라고? 그러기엔 너무, 지쳤다.

※워킹맘 시점으로 구성했습니다.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