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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군축회의 설전, 한국은 낄 틈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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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22일 스위스에서 열린 유엔 제네바 군축회의(CD) 회의장에서 한국과 북한,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들이 이례적으로 한자리에 모여 핵 문제로 격돌했다. 제네바 군축회의는 핵무기·대량살상무기 등을 대상으로 한 세계 유일의 다자간 군축 협상기구다.

미국 “우리 마음대로 역량 동원” #한국은 “북핵 포기 때 대화” 제안 #북한 “한국, 핵문제 논의 자격 없다” #북핵 처리 ‘코리아 패싱’ 우려 커져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정양석 바른정당 의원실은 24일 ‘유엔 디지털 녹음 포털’을 통해 당시 외교관들이 발언한 4시간52분44초 분량의 녹음파일을 입수했다. 중앙일보는 정 의원실에서 녹음파일을 받아 회의록 전문을 분석했다. 북핵 문제의 당사자인 4개국 ‘대표선수’들은 설전 중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코리아 패싱’ 가능성까지 드러냈다.

◆“북한은 위험하고 무모”하다는 미국=로버트 우드 미 군축 대사는 첫 번째 발언부터 북한의 도발을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이라고 비판하며 엄포를 놓았다.

특히 “미국은 ‘우리 마음대로(at our disposal)’ 가능한 모든 역량을 동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북한을 압박했다.

“군사행동 등을 결정할 때는 오로지 미국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고 외교 관계자는 전했다.

◆평화·외교적 방법 강조한 한국=주제네바 한국 대표부의 서은지 공사참사관은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적 훈련이며 ▶이를 북한이 불법적 핵 도발 중단과 연결시키는 것은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문제는 궁극적으로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돼야 한다.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옳은 선택을 할 때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뒤이어 발언한 주제네바 북한 대표부의 주용철 참사관은 이런 한국의 제안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핵은 북·미 간 논할 문제”라는 북한=주 참사관은 본국의 훈령을 읽는 듯 속사포처럼 발언했다. 그는 비핵화협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수차례 반복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을 비난하는 데 썼다. 주 참사관이 두 차례에 걸쳐 8분6초 동안 발언하는 동안 한국에 대한 언급은 47초에 불과했다.

주 참사관은 첫 번째 발언에서 “한국이 진정으로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군사적 도발을 일삼는 미국 옆에 서지 말라”고 했다. 두 번째 발언 때는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한국은 핵 문제와 관련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no qualification)”고 주장했다. “핵은 북·미 간에 풀어야 하는 문제”라면서다.

한국이 언급한 대화와 관련, 주 참사관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화와 제재’는 병행이 불가능하다”며 문재인 정부의 대북기조를 전면 부정했다. “한국은 외부 군세력에 의존하는 기존 정책에서 유턴해 미국에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우리와 뭘 하고 싶다면 미국부터 움직이라’는 메시지였다.

북한 ‘제네바 설전’ 8분6초 발언 중 한국 언급 47초뿐 

◆북·미만 통하는 ‘코리아패싱’ 우려=로버트 우드 대사는 마지막 발언에선 중국을 겨냥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과 한·미 군사훈련을 동시에 중단하자는 중국의 이른바 ‘쌍(雙)중단’ 제안이 타깃이었다. 우드 대사는 “중국의 제안은 불행히도 등가성이 맞지 않는다(false equivalency). 한쪽은 수년 동안 합법적으로 진행한 방어적 훈련을 하는 국가들이고, 다른 한쪽은 셀 수 없이 많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한 나라다.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을 등가성의 불균형”이라고 했다.

푸충(傅聰) 중국 군축 대사가 바로 반격에 나섰다. 푸 대사는 “쌍중단 제안은 무슨 등가성을 맞추려는 게 아니다”며 “대화와 긴장 완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 제안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로 대화에 착수할 시작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푸 대사는 “더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다면 우리가 이를 고려해 볼 수 있게 제발 테이블에 올려놓으라. 우리는 등가성이 맞든 아니든 모든 종류의 제안에 열려 있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한국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모든 대북 옵션을 동원할 수 있다는 미국, 어떻게든 대화를 해 보자는 중국, 한 손에는 제재·다른 손엔 대화카드를 쥐고 이쪽저쪽을 오가는 한국, 그런 한국을 북한은 노골적으로 무시하면서 ‘통미봉남(通美封南)’ 의도를 드러낸 회의였다.

주 참사관의 발언은 24일 국회 외통위에서도 쟁점이 됐다. 정양석 의원은 “북한은 북핵이 미·북 간 문제이며 대화와 제재가 병행될 수 없다고 어깃장을 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23일 한 특강에서 “북한이 실제로 핵무기를 완전히 개발하고 완성 단계로 머지않아 가게 된다면 ‘게임체인저’나 ‘코리아패싱’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며 “가능한 한 평화적 수단을 동원해 그렇게 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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