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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정석]"환갑에 10집 가수를 꿈꿉니다" 나는 딴따라 강백수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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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일하십니까?"
뻔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야 물론 돈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밥벌이 때문에 일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가 직접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구두닦이·사육사·버스기사….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입을 통해 우리가 진짜 일하는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14명의 우리 이웃이 전하는 '내가 일하는 이유'를 들어보시죠. '직업의 정석:당신은 왜 일하는가'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 특별취재팀


어릴 땐 시인을 꿈꿨고, 학창시절엔 가수가 되고 싶었다. 지금 강백수(사진)씨는 노래를 하고, 시를 쓴다. 꿈을 다 이룬 셈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지난달 17일 동네 목욕탕에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아현동 '행화탕'에서 그를 만났다. 김현예 기자

어릴 땐 시인을 꿈꿨고, 학창시절엔 가수가 되고 싶었다. 지금 강백수(사진)씨는 노래를 하고, 시를 쓴다. 꿈을 다 이룬 셈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지난달 17일 동네 목욕탕에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아현동 '행화탕'에서 그를 만났다. 김현예 기자


'딴따라' 강백수의 이야기
 술기운이 올라온다. 터덜터덜 새벽을 뚫고 집에 가는 길이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거실 한가운데. 모로 웅크려 누운 아버지 등짝이 눈에 들어온다. 술 때문인 건가. 아, 이 양반, 오늘 온종일 뭐 했으려나. 울 아버지, 참 애처롭다. 엄마가 살아계셨더라면, 아버지는 뭐라도 하고 계셨겠지. 그러게 울 아버지 옛날에 돈 있을 때, 사업만 열심히 하지 말지. 이게 뭐야.

 잠든 아버지를 지켜보던 남자는 방문을 열고 주저앉았다. 녹음기를 켜고, 기타를 집어 들고, 줄을 튕겼다. 남자의 노래 ‘타임머신’(2013년 8월)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타임머신 -강백수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1년으로 날아가
한창 잘 나가던 삼십 대의 우리 아버지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
아버지 6년 후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차라리 잠실 쪽에 아파트나 판교 쪽에 땅을 사요. 이 말만은 전할거야.
2013년에 육십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너무 힘들어 하고 있죠
남들처럼 용돈 한 푼 못 드리는 아들놈은 힘내시란 말도 못해요.
제발 저를 너무 믿고 살지 말아요. 학교 때 공부는 좀 잘하겠지만
전 결국 아무짝에 쓸모없는 딴따라가 될 거에요. 못난 아들 용서하세요.“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9년으로 날아가
아직 건강하던 삼십 대의 우리 엄마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
엄마 우리 걱정만 하고 살지 말고 엄마도 몸 좀 챙기면서 살아요.
병원도 좀 자주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이 말만은 전할거야
2004년도에 엄마를 떠나보낸 우리들은 엄마가 너무 그리워요
엄마가 좋아하던 오뎅이나 쫄면을 먹을 때마다 내 가슴은 무너져요
제발 저를 너무 믿고 살지 말아요. 학교 때 공부는 좀 잘하겠지만
전 결국 아무짝에 쓸모없는 딴따라가 되버렸죠. 못난 아들 용서하세요.“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올해 서른한 살이다. 고향이 어디냐고? 난감하다. 태어난 곳은 울산.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서울 강동구, 집안 고향은 대구다.

 초등학생 강백수는 그러니까 ‘철저히 주입식 교육에 맞춘’ 인물이었다. 공부하라 길래 공부했다. 안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으니까. 한 번은 시험을 망쳐서 성적표를 숨기려고 집에 안 들어갔다. 나름 일탈이었는데, 집에 안가고 간 곳이 학원이었다. 가출 2박3일간 학교-학원-독서실을 갔다.
 중학생 강백수는 소위 친구들이 ‘괴롭히고 놀릴거리 많은’ 인재였다. 키 작고 뚱뚱하고,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붙임성 없는 그런.

 격변기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시작됐다. 만세! 키가 무려 1년에 20㎝나 자란 거다. 거기다 중학교 때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이 다 다른 고등학교로 갔다. 이제 이전과 다른 삶을 한 번 살아볼까 싶었다. 공부에 대한 압박감도 벗어버리고 (엄마 미안해요. 고백하자면 엄마가 암투병한 이 때, 상실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맛봤어요.).

 마침 친구가 밴드를 제안했다. ‘남중(男中)에 남고(男高)’라는 슬픈 진학 이력을 갖고 있던 내게 “밴드하면 이웃 여고 축제에 갈 수 있다”고 꼬신 거다. 밴드 이름은 초코우유. 하지만 여고 축제 무대에 서겠다는 꿈은 졸업할 때까지 끝내 못 이뤘다. 대신 줄창 베이스기타 연주만 했다. 아,락(rock)은 운명이었다.

강백수는 자신을 '문학과 음악의 요정'이라고 소개했다." '신'은 한 명인데 요정은 수두룩 빽빽하잖아요, 그 정도 수식어는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에 별칭을 만들었다"고 했다. 김현예 기자

강백수는 자신을 '문학과 음악의 요정'이라고 소개했다." '신'은 한 명인데 요정은 수두룩 빽빽하잖아요, 그 정도 수식어는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에 별칭을 만들었다"고 했다. 김현예 기자

공부 하는 날라리, 시인이 되다
 꿈꿔오던 ‘공부 잘 하는 날라리’가 됐지만, 입시는 피할 수 없었다. 고3 때 과외 선생님과 마주 앉았는데, 미학 전공인 우리 과외 선생님, 영화 ‘매트릭스’ 이야기를 하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철학자 데카르트 이야기를 풀어냈다. 아, 이 형 멋있다. 인문학은 멋있는 거구나. 초등학교 때부터 글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 아닌가. 그럼 나는 국문과다!

  '공오(2005년) 학번' 대학생이 된 강백수는 빨간 머리에 귀를 10곳이나 뚫고 다녔다. 시인이 된 건 2008년의 일이다. 박목월 선생님의 수제자이자 ‘한국 모더니즘 거목’으로 평가받는 한양대 이승훈 교수(시인)님의 시창작 수업을 들었다. 매주 시 한 편을 쓰고 합평하는 강의였는데, 처음 쓴 시가 호평을 받았다. 두 번째 시도 마찬가지였다. 연달아 칭찬받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선생님께 그야말로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작품을 내보라시기에 냈더니, 2008년 ‘시와 세계’에서 신인상을 탔다. 그렇게 등단 시인이 됐다.

 밴드도 계속 했다. 대학 때 만난 친구들과 만든 밴드 이름은 ‘네이키드 에이프(Nakid Ape)'. 우리말로 풀면 벌거벗은 원숭이쯤 되겠다. 밴드를 만들고 나니 ‘기왕 하는 거 홍대 클럽에서 공연 한 번 해보자’ 싶었다. 근데 공연을 하려면 자작곡이 필요하단다. 2006년 고성으로 간 학술답사에서 경험한 사건(!)을 바탕으로 첫 자작곡을 썼다. 노래 제목이 ‘왜 내게 키스를 했니’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의 재능이에요." 그가 술잔을 기울이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노래가 되고 시가됐다. 그가 2015년 쓴 책 '사축일기'도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졌다. 책 서문에 "그들의 삶을 마음껏 표저하도록 합의해준 많은 친구들"에 대한 감사가 적혀있는 이유기도 하다.김현예 기자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의 재능이에요." 그가 술잔을 기울이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노래가 되고 시가됐다. 그가 2015년 쓴 책 '사축일기'도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졌다. 책 서문에 "그들의 삶을 마음껏 표저하도록 합의해준 많은 친구들"에 대한 감사가 적혀있는 이유기도 하다.김현예 기자

작가 혹은 가수

 직업이 뭐냐고? 난 직업란에 작가라고 적는다. 시인? 직업이라는 게 그 일로 어느 정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한민국에 시인은 무수히 많지만, 시로 먹고 사는 사람은 얼마 없다. 시인이란 타이틀은 내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 중 하나일 뿐, 선뜻 직업이라고 부르기엔 어렵다. 그래서 시인이 아니라 작가라고 적는다.

 작가 말고 가수라고도 쓴다. 2010년 2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셀프 졸업선물'로 첫 앨범을 냈다. 제작비 80만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만들었는데 딱 38장 팔았다. 앨범은 냈지만 그때만 해도 직업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아는 형이 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중등종합반을 시작으로 고등단과반까지 훑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한달에 600만원을 벌었다.
한데 뭔가 공허했다. 그래서 돈을 모두 쓰기로 했다. 출근하고, 가르치고, 술 먹고. 슬픈 게 뭔 줄 아나. 이렇게 번 돈을 다 쓰고 놀아도 재미가 없는 거다. 나이 스물다섯에 술먹고 돈쓰고 노는 것이 슬픈 일이 될 줄이야.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아이들 학교 방학이 시작되면서 수업시간이 앞당겨졌다. 내게도 ‘저녁 있는 삶’이 주어졌다. 음, 그럼 나도 한 번 버스킹이나 해볼까. 홍대놀이터에 자리를 폈다. 팁박스 없이 공짜로 노래를 불렀다. 내 노래만 부르고 다니는데, 아! 돈 십원도 안 되는 이 일은 너무나 즐겁다!

"피아노는 피아노가 있는 곳에 내가 가야지만 연주할 수가 있지만 기타는 달라요. 언제든지, 어디든지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악기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강백수씨는 기타를 들러매고 강원도 속초로 향했다. 김현예 기자

"피아노는 피아노가 있는 곳에 내가 가야지만 연주할 수가 있지만 기타는 달라요. 언제든지, 어디든지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할 수 있는 자유로운 악기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강백수씨는 기타를 들러매고 강원도 속초로 향했다. 김현예 기자

직장인과 딴따라의 길목에서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나니 아이들 가르치는 일은 더 재미없어졌다. 2011년 봄, 기적처럼 한 지방 소도시에서 30만원에 공연을 해달라는 ‘행사 섭외’가 들어왔다. 냅다 주판알을 튕겨봤다. 내가 한 달에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 말이다. 셈을 해보니 한달 70만원이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40만원짜리 과외 하나만 하고 학원을 접기로 했다. 까짓거, 돈 없으면 안 나가고 집에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600만원짜리 일터여 안녕.

 그때부터 가수가 진짜 내 직업이 됐다. 다들 예상하겠지만 돈을 못벌 때도 많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밴드 멤버들과 뚱땅거리고 밤에는 술 마시며 산다. 사실 요즘 숙취로 힘들어하는 시간이 꽤 늘어났는데, 변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많이 얻어오는 편이다(사실 그렇게 합리화를 한다). 술자리 파하고 집에 오면 들었던 이야기를 메모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당 아줌마가 음식 재료 손질하듯 간밤 취중메모를 정리한다. 이 이야기는 시를 써야지, 이건 곡을 만들거야, 이걸로는 산문을 써야지. 이렇게. 일을 한다.

대학시절 귀는 열개쯤 뚫고, 빨강머리를 하고 다니는 '튀는 학생'이었던 강백수. 가수가 되고나서 한 교수님께서 '백수광부'같다고 농담 섞어 이야기하신 데서 반짝 아이디어를 얻어 '백수'라 이름 지었다. 그의 본명은 강민구. 기타줄을 튕기던 그가 합장을 하자 '시(詩)'가 됐다. 김현예 기자'

대학시절 귀는 열개쯤 뚫고, 빨강머리를 하고 다니는 '튀는 학생'이었던 강백수. 가수가 되고나서 한 교수님께서 '백수광부'같다고 농담 섞어 이야기하신 데서 반짝 아이디어를 얻어 '백수'라 이름 지었다. 그의 본명은 강민구. 기타줄을 튕기던 그가 합장을 하자 '시(詩)'가 됐다. 김현예 기자'

특별취재팀=김현예·정선언·정원엽 기자, 사진 우상조 기자, 디자인 김은교, 영상 조수진 hykim@joongang.co.kr

나는 왜 일하는가

생활 전체가 일이다
 책『사축일기』를 냈다.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또 강연도 한다. 내 일이라는 게 딱 한 가지로 표현되질 않는 셈이다. 어찌 보면 내 생활전체가 일이다. 내 일의 장점은 놀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단점은 24시간 놀면서도 일하는 것이다.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때면 조금 불행해진다. 가령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이 고갈됐다는 생각으로 슬럼프가 올 때가 있다.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아니라, 이 일을 못할까봐 받는 스트레스인 거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직장생활, 그야말로 "거지 같은"데 "처자식 때문에 일한다"고 한다. 친구들에겐 ‘처자식’이란 중요한 가치란 뜻이다. 그걸 지켜내는 일을 하고 있으니 무가치한 인생이 아니잖나. 그런데 사람들은 직업에 너무 큰 비중을 둔다. 직업이 행복하지 않으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친구들은 가족 때문에 일하는데 정작 일하느라 가족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취미생활 해야지 하는데, 웬걸. 시간이 없다. 문제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는 데 쏟는 데서 불행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자산관리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노후 대비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 대답이 이랬다. "무슨 노후대비를 해요?" 나같이 창작하는 사람은 정년이 없으니, 특별한 노후대비 방책이랄게 필요없다는 뜻이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3년에 한 번씩 정규 앨범을 내왔는데, 10집까지 내면 평생 가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2047년쯤에 사람들이 ‘아 강백수 음반 10장만 들어도 세월이 보인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하며 전해들은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 됐다.'5년 전 나의 장래 희망은 /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 지금 나의 장래 희망은 / 출근을 안 하는 것이다 .- '5년전', 『사축일기』에서 발췌

친구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하며 전해들은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 됐다.'5년 전 나의 장래 희망은 /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 지금 나의 장래 희망은 / 출근을 안 하는 것이다 .- '5년전', 『사축일기』에서 발췌

사실 난 평범한 사람이다. 
 직업이 특이할 뿐. 사실 난 평범한 사람이다. 세월호 유가족분들 앞에서 ‘타임머신’을 불렀을 때 ‘이 노래 만들길 참 잘했다, 가수하길 잘 했다’ 생각했다. 나도 가족을 잃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남아있는 가족들 때문이지 않나.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암투병한 엄마의 이야기를 썼던 ‘뒤통수도 예쁜 그대’도 고마운 경험을 선사했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한 분이 ‘위로가 됐다’고 해주시더라. 그런 순간들이 참 행복하고 잊을 수가 없다.

 다시 나는 왜 일하는가란 질문으로 돌아가면, 내 답은 이거다. “나는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들기 위해 일한다!”

[직업의 정석]#0 놀기 위해 일하는 20대, 일을 위해 일하는 40대
[직업의 정석]#1"내가 지면 몰수게임" 나는 태극전사 버스기사 장승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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