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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우리 마을엔 예술가가 산다" 시골 빈집을 갤러리로 탈바꿈시킨 완주군의 실험, 가난한 청년 작가들이 완주로 간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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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예술가는 대체로 가난하다. 대부분 무명(無名)이어서 작품이 잘 팔리지 않아서다. 주로 도시에서 활동하기에 오롯이 작업할 공간조차 갖기 어렵다.

전북 완주군 '완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 운영 #창작 공간과 새로운 영감 찾는 청년 예술인과 #예술·문화에 목마른 지역 주민 맺어주는 사업 #회화·공공미술·시나리오 작가 4명 이달 초 입주 #마을 풍경 그리고 폐가구로 작업하며 주민과 소통 #완주문화재단 "지역에 우호적인 예술가 그룹 얻고 #유휴공간 장기간 제공해 마을에 활력 불어넣을 것"

반면 농촌은 빈집 등 안 쓰고 놀리는 공간이 많다. 젊은이들은 학교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고 남은 주민은 65세 이상 노인이 대다수다. 예술 작품이나 공연 등을 볼 기회는 더더구나 드물다.

이런 젊은 작가들의 고민과 농촌의 구조적 한계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북 완주군이 이런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최규연(27·여) 작가가 이달 초부터 대학원 동기인 임정은(33·여) 작가와 함께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인덕마을 '귀농인의 집'.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이달 초부터 대학원 동기인 임정은(33·여) 작가와 함께 머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인덕마을 '귀농인의 집'. 완주=김준희 기자

전국에서 활동하는 만 19~39세 청년 예술가들이 완주에 있는 마을에 한 달간 머물며 주민이 내준 빈집이나 마을 창고 등 유휴 공간에서 작업하는 '청년작가 완주 한 달 살기' 프로젝트다. 창작 공간과 새로운 영감이 절실한 예술가와 다양한 문화·예술에 목마른 농촌 지역 주민을 맺어주자는 취지로 완주문화재단이 지난 3월 기획했다.

지난 18일 오후 3시 전북 완주군 소양면 인덕마을. 숲이 우거진 산자락에 초가집이 있다. 황토 벽 위에 짚으로 만든 지붕을 인 단층짜리 한옥이다. 집 안에 들어서니 방바닥에는 물감과 아크릴·색연필 등이 널브러져 있다.

완주문화재단이 기획환 '청년작가 완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최규연(27·여) 작가가 지난 18일 소양면 인덕마을 '귀농인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완주문화재단이 기획환 '청년작가 완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최규연(27·여) 작가가 지난 18일 소양면 인덕마을 '귀농인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방 한가운데서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최규연(27·여) 작가가 자그마한 밥상 위에 캔버스를 펼쳐 놓고 색칠을 하고 있었다. 최 작가는 "(이 그림은) 가끔 산책을 가는 송광사에서 본 불상"이라고 설명했다. 송광사는 마을 근처에 있는 사찰이다. 최 작가는 "일상적인 물건이나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일부터 이 집에서 홍익대 대학원 회화과 동기이자 여섯 살 언니인 임정은(33·여) 작가와 함께 먹고 자며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 토박이인 두 사람은 앞서 경기도 수원에서도 공장의 빈 공간을 활용한 작업실을 함께 쓸 정도로 단짝이다. 두 화가가 현재 작업실로 쓰고 있는 집은 원래 2010년 7월 인덕마을 주민들이 '귀농인의 집'으로 지은 곳이다. 귀농인들이 머물던 집이 비게 되자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이다.

최규연(27·여) 작가가 지난 18일 소양면 인덕마을 '귀농인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 완주=김준희 기자

최 작가는 완주로 내려온 이유에 대해 "조용한 시골 생활을 하며 작업을 하면 생각이 환기가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날 충남 천안에 있는 충남예고에 실기수업을 하기 위해 집을 비운 임 작가는 "작업을 계속 하다 보니 새로운 자극과 영감이 필요했다"며 "여름이라 여행 느낌도 나고 (머무는 기간이) 한 달이라 부담도 없어서 공모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한 작품씩 완성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지금은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있다"며 "원래는 반짝거리는 풍선 등 팝 요소가 있는 작업을 했는데 (완주에 와서는) 풍경도 그리고 이것저것 붓 가는 대로 그린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온 게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지만 규연이와 서로 '괜찮다'고 토닥여주면서 재미있게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규연(27·여) 작가가 룸메이트인 임정은(33·여) 작가가 자신을 모델 삼아 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룸메이트인 임정은(33·여) 작가가 자신을 모델 삼아 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화가들이 머물면서 평범한 농가는 '미니 갤러리'로 변신했다. 방이며 부엌이며 벽마다 두 사람이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 등이 빼곡히 걸렸다. 모두 이들이 인덕마을에 와서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중에는 최 작가가 모델로 나오는 작품도 여러 장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이 마을 근처 초등학교에 갔다가 뒷머리를 묶거나 승용차를 운전하는 최 작가의 모습을 임 작가가 그린 것이다. 집 마당에는 두 사람이 산책할 때 이용하는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최 작가는 "주민과 일부러 소통하려고 하진 않는다"면서도 "오며 가며 만나면 인사하고 마을에서 하는 모임에 나가 (주민들과) 밥 먹고 온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10여 년간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목공 및 설치 작업을 해온 김영봉(37) 작가는 이달 초 경천면 원용복마을에 있는 창고에 둥지를 틀었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고추와 마늘 등을 말리던 공간이다.

임정은(33·여) 작가가 이달 초 완주군 소양면 인덕마을에 머물면서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 등이 벽마다 걸려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임정은(33·여) 작가가 이달 초 완주군 소양면 인덕마을에 머물면서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 등이 벽마다 걸려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완주에서 시골 생활을 하며 그린 그림들이 벽과 바닥에 놓여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완주에서 시골 생활을 하며 그린 그림들이 벽과 바닥에 놓여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그린 그림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가 그린 그림들. 완주=김준희 기자

김 작가는 "보통 예술가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서울에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해 지방으로 눈을 돌리던 차에 완주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앞서 지난 3월 완주군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용진면에 있는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활동가'가 그의 또 다른 직함이다. 그는 "에너지와 자원을 최대한 절약하고 환경을 덜 훼손하는 기술들을 교육하고 연구하고 보급하는 단체"라고 새 직장을 소개했다.

그는 "작업실이 아닌 거리로 나오거나 동네로 들어가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지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아니더라도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했다"며 "서울에서는 적응할 만하면 (건물 임대료가 오르는 등)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작업실을 옮겨다니기 바빴다"고 말했다. 김 작가 역시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피해자였던 셈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예술인이나 상인들이 동네에 들어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임대료가 뛰면 원래 살던 주민이나 상인·예술가들이 동네에서 쫓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최규연(27·여) 작가와 임정은(33·여) 작가가 자는 방. 텐트형 모기장이 쳐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최규연(27·여) 작가와 임정은(33·여) 작가가 자는 방. 텐트형 모기장이 쳐 있다. 완주=김준희 기자

아직 미혼인 그는 "낮에는 조합에서 일하고 퇴근 후인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작업실을 사용한다"고 했다. 완주에서 일자리와 작업실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김 작가는 아예 완주에 귀향을 꿈꾸고 있다. 그는 "마을에서 버려지는 폐자원이나 폐목재·생활쓰레기 등을 주워와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주민들이 평소에 쓰지 않던 물건의 기능을 바꿔본다든지 공동 작업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조규준(36) 작가는 지난 10일부터 고산면 안남마을의 한 농가를 집필실로 쓰고 있다. 집주인이 도시로 나가면서 비게 된 집이다. 조 작가는 단편영화 '허수아비의 반격'과 '이방인' 등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까지 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10여 년간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목공 및 설치 작업을 해온 김영봉(37) 작가가 이달 초부터 작업실로 쓰고 있는 완주군 경천면 원용복마을의 창고. 주민들이 고추와 마늘 등을 말리던 공간이다. [사진 김영봉 작가]

서울에서 10여 년간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목공 및 설치 작업을 해온 김영봉(37) 작가가 이달 초부터 작업실로 쓰고 있는 완주군 경천면 원용복마을의 창고. 주민들이 고추와 마늘 등을 말리던 공간이다. [사진 김영봉 작가]

그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보니 생각도 잘 정리되고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라며 "마을에 온 지 일주일 됐는데 힐링(치유)받는 느낌이고 집필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다큐멘터리까지 포함해 6편의 영화를 서울에서 주로 만들어 온 그가 시골 생활을 택한 데는 지난해 7월 '제15회 바르셀로나 아시안필름페스티벌' 장편 경쟁 부문 특별심사위원으로 초청받은 경험이 영향을 줬다.

그는 "당시 스페인 바르셀로나 외곽의 작은 마을에 3주간 머물렀다"며 "지인의 권유로 마을의 조그만 카페에서 내 영화를 상영했는데 처음엔 누가 올까 싶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고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의 (영화 보는)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고 말했다. "작은 마을인데도 주민들끼리 예술 작품을 공유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지역 커뮤니티(공동체)가 잘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완주에 내려오게 됐다"고 말했다.

완주문화재단이 기획한 '청년작가 완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영봉(37)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마을 창고 내부 모습. 말린 마늘 옆으로 김 작가가 작업하는 책상이 놓여 있다. [사진 김영봉 작가]

완주문화재단이 기획한 '청년작가 완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영봉(37)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마을 창고 내부 모습. 말린 마늘 옆으로 김 작가가 작업하는 책상이 놓여 있다. [사진 김영봉 작가]

조 작가는 완주에 머무는 동안 마을 주민들의 모습도 다큐멘터리에 담아볼 예정이다. 그는 "억지로 촬영하면 진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먼저 지역 사람처럼 살아보고 뭘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며 "바르셀로나처럼 지역의 문화 커뮤니티가 자리 잡아 가고 젊은 예술가들이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면 (주민들도) 전반적으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쪽으로 발전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도 외부에서 온 예술가들을 낯설어 하면서도 기대감을 나타냈다. 유철환(64) 인덕마을 이장은 "마을에 빈집이 많은 데다 그 사람(작가)들도 농촌에 직접 들어와서 그림을 그려 보면 머릿속에만 있던 농촌과 전혀 다를 것"이라며 "주민 50명 대부분이 60대 이상인 시골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온 것 자체가 활력"이라고 말했다.

김영봉(37)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마을 창고 내부 모습. [사진 김영봉 작가]

김영봉(37)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마을 창고 내부 모습. [사진 김영봉 작가]

완주문화재단은 지난 5~6월 공모를 통해 '청년작가 완주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할 예술가 13명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4명은 지난달 완주에 머물며 작업을 마쳤고, 이달부터 최규연 작가 등 4명이 2차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나머지 작가 5명도 각자 개인 일정에 따라 오는 11월까지 순차적으로 완주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할 예정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작가들에게는 주거 및 작업 공간과 더불어 창작 지원금(30만원)도 주어진다. "작가들은 완주의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쌓고 '완주 한 달 살이'를 통해 만든 창작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개하고 주민들과 공유하면 된다"고 완주문화재단 측은 설명했다.

김영봉(37)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마을 창고 내부 모습. 주민들이 말리던 마늘이 그대로 있다. [사진 김영봉 작가]

김영봉(37)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마을 창고 내부 모습. 주민들이 말리던 마늘이 그대로 있다. [사진 김영봉 작가]

이번 사업은 인구 9만5000명의 도농복합도시로서 완주군이 펼치고 있는 귀농·귀촌 지원 및 청년 유입 정책에 발맞춰 완주문화재단이 추진하고 있다. 청년 예술가들의 '문화 귀향'을 견인하고 지역의 예술 창작과 향유·유통이 선순환하는 예술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안한 파일럿 프로그램이다. 재단 측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완주에 우호적인 예술가 집단을 만들고 지역의 문화·예술계에도 새로운 자극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송은정 완주문화재단 사무국장은 "특정 공간을 인위적으로 지어서 예술가들에게 거주·전시·작업 공간을 지원하는 기존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과 달리 완주문화재단의 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이 마을 주민들의 삶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완주군 전체 13개 읍·면의 폐가와 빈집 등 유휴 공간을 예술가들에게 장기간 제공해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공동체 재생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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