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1956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향해 던진 말이다. 이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며 사법부를 정면 비판한 직후였다. 김 전 대법원장은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이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헌법주의자'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이승만 독재 맞서 사법부 수호 #10년 2개월 최장수 민복기 대법원장 #박정희 정권 협조 '사법부 암흑기' 평가도 #일선 판사들은 제왕적 권한 축소 주장도
김 전 대법원장의 이 한 마디는 사법부 독립과 법치주의의 원리를 상징하는 말로 법조계에 이어져 왔다. 김 전 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다. 막강한 권력을 쥔 이 대통령도 달리 손 쓸 방도는 없었다.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의 권한과 국민의 신뢰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1953년 12월 12일 전국사법감독관회의(현 전국법원장회의)가 끝난 뒤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각급 법원장 등과 함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가운데 흰색 두루마기에지팡이를 짚고 이 대통령 옆에 선 사람이 김 전 대법원장이다. 그는 1950년 2월 골수염 수술로 왼쪽 무릎 이하를 절단한 이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사진제공=대법원]](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8/21/0806233b-37e8-4cc2-b987-d3abfee2f4f9.jpg)
1953년 12월 12일 전국사법감독관회의(현 전국법원장회의)가 끝난 뒤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각급 법원장 등과 함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가운데 흰색 두루마기에지팡이를 짚고 이 대통령 옆에 선 사람이 김 전 대법원장이다. 그는 1950년 2월 골수염 수술로 왼쪽 무릎 이하를 절단한 이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사진제공=대법원]
대법원장의 권한은 '제왕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크다. 13명의 대법관에 대한 임명 제청권이 있다. 대법관 전원이 참여해 중요 사건의 판례를 수립하는 전원합의체 재판장도 맡는다. 이로 인해 대법원의 성향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평가다. 헌법재판소 재판관(3명)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3명), 국가인권위원회 위원(3명)의 지명·추천권도 대법원장의 권한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새로 임명되는 대법원장은 이번 정부에 임기가 끝나는 대법관 10명과 헌법재판관 2명의 후임자를 선택할 수 있다.
인사와 예산 등 법원 운영에 관한 전권도 대법원장에게 있다. 3000명 넘는 법관의 임용권을 대법원장이 행사한다. 법원 내부의 인사와 예산 등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장(대법관)도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각종 규칙 제·개정 권한을 가진 대법관회의의 의장이다.
정치권력, 대법원장 통해 사법부 장악 시도
이때문에 정치권력의 대법원장 선택은 정치적 해석이 뒤따른다. 대법원장을 통해 사법부를 장악하고 법률 해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선 이같은 인선 방식을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 사법부가 관료화된 원인이 대법원장의 방대한 권한에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법원 내부의 개혁 목소리나 국회 개헌특위의 사법개혁 방안에 대법원장의 권한 축소가 늘 첫번째로 거론된 이유이기도 하다.
사법부는 때로는 정치권력에 휘둘린 ‘흑역사’가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대법원장을 연임한 민복기 전 대법원장에게 그런 불명예가 뒤따른다.
![1968년 10월 박정희(오른쪽) 대통령이 민복기 대법원장(왼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8/21/476aa066-74cc-4f78-8ccc-ab4086b27b17.jpg)
1968년 10월 박정희(오른쪽) 대통령이 민복기 대법원장(왼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민 전 대법원장은 1968년 10월 5대 대법원장에 올랐다. 재임기간은 10년 2개월로 법조 사상 최장수 대법원장이다.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임용된 뒤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을 거쳤다.
1971년의 1차 사법파동과 이듬해 유신헌법에 따른 재임용 파동이 민 전 대법원장 재임 중에 벌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국가배상법 2조를 위헌이라고 결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 제정 후 국가배상법 위헌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지금의 대법관) 9명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일반 법관 41명도 옷을 벗었다.
정치권력의 사법부 장악 시도는 노골적이었다. 민 전 대법원장은 그런 유신독재를 옹호했다. 1973년 신년사에서 그는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이 당연한 귀결”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법 살인’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은 ‘인혁당 사건’은 민 전 대법원장 재임 중 일어난 대표적인 정치 판결이다. 유신독재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날조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자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사형은 대법원 판결 후 18시간 만에 집행됐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의 상고를 기각했다. 사형 집행은 대법원 선고 후 18시간만에 이뤄졌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8/21/3a54c2d9-653e-4496-86d3-815c651ec843.jpg)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의 상고를 기각했다. 사형 집행은 대법원 선고 후 18시간만에 이뤄졌다. [중앙포토]
독재에 협조했다는 평가받는 '흑역사'도
이 사건은 2005년 재심이 결정됐다. 대법원은 2015년에 관련자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08년 이용훈 대법원장이 사법부 60주년 기념식에서 “사법부가 헌법상 책무를 충실히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드린 데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2008년 9월 대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에서 과거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8/21/526b3406-1c26-4989-9755-caf3e3fe3427.jpg)
이용훈 대법원장이 2008년 9월 대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에서 과거의 잘못된 판결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무일 검찰총장도 지난 8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검찰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시국사건 등에서 적법 절차 준수와 인권 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밝히면서 인혁당 사건을 사례로 거론했다.
민 전 대법원장 직전 3,4대(1961~1968년) 대법원장을 역임한 조진만 전 대법원장은 김병로 전 대법원장의 사법부 독립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8년 대법원이 동백림 간첩단 사건 피고인 12명의 간첩 혐의를 인정한 원심을 파기하자 유령 어용단체가 대법원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였다. 조 전 대법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 사건은 사법부에 대한 정면 도발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법관들이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조 전 대법원장이 후배 법관들에게 한 말은 후배 법관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법관은 공정을 의심케 하는 모든 언행을 삼가야 하겠기에 친구 내지 가족들에게서 동떨어진 외톨이가 되는 것도 사양하지 않아야 한다. 법관은 돈벌이 하는 직업이 아니라 봉사하는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이일규 전 대법원장(10대)은 인혁당 사건 재판에서 대법관들 중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낸 소신 판사였다. 대법원장 재임 기간은 2년 반에 불과했지만 1973년에 대법관이 되어 퇴임할 때까지 17년 동안 대법관으로 재직했다. 한때 안기부가 그를 미행할 정도로 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2007년 12월 2일 사망한 뒤 그의 장례는 대법원의 첫 법원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대법원은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았다. 이에 대법원장 임기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혼란기에 대법원장을 지냈던 조용순(2대), 이영섭(7대), 김용철(9대), 김덕주(11대) 전 대법원장은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법관들의 반발을 사거나(사법파동), 개인의 부정, 정치적인 이유 등 대법원장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뒤부터 대법원장의 임기는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1993년부터다. 12대 윤관, 13대 최종영, 14대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6년 임기를 모두 채웠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다음달 24일 임기를 마치게 된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