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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극중주의’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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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환영 논설위원

김환영 논설위원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정치학자의 수만큼 많다”는 말처럼 어떤 용어에 대한 합의는 힘들다. ‘극중주의(極中主義)’라는 생소한 용어가 안철수 전 국민의당 의원의 3일 당 대표 출마 선언과 후보 토론 과정에서 나왔다. 극중주의는 ‘radical centrism(래디컬 센트리즘)’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다른 번역도 가능하다. 영한사전에서 ‘radical’을 찾아보면 ‘근본적인, 철저한, 급진적인, 과격한, 급진파의, 급진주의의, 기막히게 좋은, 끝내주는’이라고 나온다. ‘centrism’은 ‘중도주의’다. 번역하기에 따라 ‘근본적인 중도주의’ ‘끝내주는 중도주의’가 될 수도 있겠다.

정치·경제 양극화 배경으로 #20세기 말 생긴 정치 이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도 표방 #좌우를 초월하는 정책 추구

안 후보는 당 대표 출마 선언에서 극중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보통 ‘극좌’나 ‘극우’에 대해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그렇지만 반면에는 ‘극중’이 있습니다. 정말로 치열하게, 좌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에 매진하는 것, ‘중도’를 극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것, 그것이 바로 ‘극중주의’입니다.”

안 후보의 극중주의 정의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극중주의는 보수” “기회주의” “자기 정체성이 없는 노선” “한국 정치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개념” “기삿거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말” “형용모순” “심하게 말하면 영어 단어로 ‘bull shit(헛소리)’” “정치학 교과서에도 없는 말”.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이러한 평가는 모두 일리가 있다. 예컨대 극중주의가 보수주의의 모습을 띨 때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5월 17일 ‘마크롱의 극중주의는 보수주의와 꽤 비슷하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재미있는 반응 중 하나는 이런 식이다. ‘극중(extrême-centre) 노선으로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을 염두에 둔 발언 같은데, 마크롱에 대한 지지는 이미 급락하고 있다. 마크롱이 망하면 안철수도 망한다’.

특정 정치인의 미래가 어떻게 되건 극중주의는 생명력을 발휘할 것이다. ‘족보’가 있는 개념이다. 일단 영국의 명품 경제지인 이코노미스트가 극중주의를 표방한다. 2013년 이코노미스트는 창립 170주년을 맞아 ‘이코노미스트가 스스로를 설명하다: 이코노미스트는 좌익인가 우익인가. 둘 다 아니다. 우리는 극중(radical centre)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좌파·우파 정당들의 노선을 떠나 자유시장경제, 평등, 인류의 전진을 추구한다는 게 요지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사들이 극중주의자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2011년 ‘극중연합’이라는 당명으로 미국 정당정치를 개편할 제3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는 평평하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와 같은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1909~2005), “제3의 길은 극중과 동의어”라고 1998년 말한 사회학의 거성 앤서니 기든스도 자천·타천 극중주의자다.

극중주의는 20세기 말에 생긴 정치철학이자 이념이다. 세계 민주주의 담론에서 가장 뜨거운 소재의 하나다. 극중주의 탄생의 배경은 정치 양극화와 경제 양극화다. 정당들의 노선이 극단적으로 흐른다. 타협을 모른다. 21세기 ‘극좌’ ‘극우’는 20세기 스탈린의 ‘극좌’나 히틀러의 ‘극우’와는 다르다. 하지만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는 마찬가지다. 상위 1%, 10%가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경제 양극화는 민주주의뿐 아니라 시장경제를 위협한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은 극단적 해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단순한 중도가 아니라 ‘극단적인 중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당위성이 생긴다.

극중주의는 좌파·우파의 정책적 연원을 따지지 않는다. 좌우 정책을 결합했을 때 모순이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예컨대 복지와 성장은 충돌하지 않는다. 미국 정치에서 항상 논란인 ‘작은 정부’ vs ‘큰 정부’ 대결도 별 의미가 없다. 이렇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국가·정부는 복지에 전념한다. 필요하면 공공부문 종사자 수를 늘린다. 동시에 기업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성장을 도우면 된다.

한국 정치에 극중주의는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제3당 창당을 통한 집권이라는 마크롱 모델이 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극중주의는 150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자유당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극중주의를 ‘진정한 진보주의(True Progressivism)’라고도 부른다. 용어는 포장일 뿐 내용물이 중요하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정책만 봐서는 이미 극중주의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아닌가’. 이념 토론이 네거티브 설전보다 바람직하다. 정책은 이념에서 나온다. 정치에서 힐난은 언제 사라질까.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