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될 수밖에 없는 소리란 무엇일까, '장산범' 허정 감독

중앙일보

입력 2017.08.17 16:56

[매거진M] 공포·스릴러 장르가 메말라 가는 최근 한국영화계에, 첫 장편인 스릴러 ‘숨바꼭질’(2013)로 관객 560만 명을 모으며 뜨겁게 주목받은 허정(36) 감독. ‘장산범’(8월 17일 개봉)은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역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스릴러다. 목소리를 흉내 내 사람을 홀린다는 ‘장산범’ 괴담에서 모티브를 얻어, 아들을 희연(염정아)이 의문의 여자아이(신린아)에게 빠져드는 이야기다. ‘집’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욕망과 불안을 그린 ‘숨바꼭질’과 달리, ‘장산범’에서는 좀 더 원초적인 서스펜스를 그리고 싶었다는 그에게 물었다. 공포·스릴러영화를 계속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허정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허정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람을 홀린다는 ‘장산범’ 인터넷 괴담에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소리로 사람을 홀린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어떤 소리가 들리는데 그게 진짜인지, 장산범이 내는 소리인지 모른다는 데서 극적 긴장을 끌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가 어떤 사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면 어떨까. 전설이나 신화에 그런 식의 이야기가 많지 않나. 그런 모티브들을 더해 시나리오를 썼다.”

―장산범의 소리에 홀릴수록 시력이 흐려지고, 장산범이 거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설정도 그렇게 더한 건가.
“소리로 사람을 꾀는 만큼,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인물의 시력이 흐려진 정도로 장산범에 홀린 단계를 표현할 수도 있고. 거울은, 장산범의 소리가 그 인물의 취약점을 건드린다는 설정과 어울리는 소재라 느꼈다. 거울 안쪽에 그 인물의 약한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가, 소리가 돼 나오는 거다.”

'장산범' 스틸컷

'장산범' 스틸컷

―장산범에 현혹되는 주인공 희연을,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로 설정한 이유는.
“어떤 사람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소리란 과연 뭘까, 많이 고민했다. 결국 부모가 잃어버린 자식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큼, 관객을 힘 있게 설득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실제 아이를 잃은 분들의 인터뷰 기사를 많이 찾아봤다. 상실감뿐 아니라, ‘그때 내가 이렇게 했다면…’‘그 순간 남편이 나를 도와 줬다면…’ ‘아니야, 내 잘못이야’ 하는 식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더라. 그래서 극 후반 동굴 장면에서 장산범이 희연의 그러한 심리를 여러 목소리로 드러내 현혹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의문의 여자아이가 희연의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는 대목에서, 희연의 딸 준희(방유설)의 목소리를 따라한다. 한데 생각만큼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나도 그 점이 아쉽다. 시나리오로 쓸 때 상상한 것과 달리, 여자아이의 입 모양에 (방)유설의 목소리를 입혀 보니, ‘목소리를 따라한다’는 사실을 그 순간 딱 알아차리기 쉽지 않더라(웃음). 성별이나 나이 대가 다른 목소리를 입히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아이와 어른의 말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걸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후반작업 단계에서 전략을 바꿨다. 방금 말한 그 장면에서 관객이 ‘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그 다음 장면에서 여자아이가 남의 목소리를 따라 한다는 걸 정확히 보여 주는 것이다. 여자아이가 한밤중에 준희의 태블릿 PC로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임’을 하는 모습을, 희연의 남편 민호(박혁권)가 바라보는 장면 말이다.”

―‘장산범’을 연출하며 사람의 목소리와 영화의 사운드에 대해 공부 많이 했겠다.
“너무 어렵다. 앞으로는 이런 영화 하지 말아야겠다(웃음). 괴담에서 장산범의 모습이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하지 않나. 그래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영화 곳곳에 아주 적극적으로 쓰기도 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 강하니까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장산범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는 듯한 느낌을 내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장산범' 스틸컷

'장산범' 스틸컷

―집과 가족을 중심에 둔 스릴러라는 점은 같지만, ‘숨바꼭질’과 ‘장산범’은 성격이 퍽 다르다. ‘숨바꼭질’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일상적 공포를 적극 끌어들인다면, ‘장산범’은 보다 토속적인 공포를 다루는데.
“‘숨바꼭질’에서는, 우리 모두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는 동시에, 언제든 지금의 환경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을 지니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점 말이다. ‘저주의 기간’(2010) ‘주희’(2012) 같은 단편 연출작 역시 현실적인 상황이나 맥락을 바탕으로 한다. 그에서 벗어나, ‘장산범’에서는 보다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매혹되는 동시에 무서움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장산범’에서 그 원초적 공포와 매혹을 극대화하는 공간은 마지막 장면의 폐쇄된 동굴이다.
“이 영화를 구상하면서 어두운 데서 소리만 듣고 더듬더듬 나아가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떠오르는 공간 말이다(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아내와 함께 지옥을 빠져나가기 직전 저승의 왕 하데스의 방침을 어기고 뒤를 돌아봤다가 아내를 놓치고 만다). 지하의 어두운 공간으로 폐쇄된 군부대나 터널을 생각하기도 했는데, 최종적으로 동굴로 정했다. 실제 동굴 안에서 굿을 하는 무당들이 꽤 있다고 하더라. 극 후반에 등장하는 무당 중년 사내(이준혁)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공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20여 분 동안 이어지는 결말의 동굴 장면이 극의 절정을 이룬다. 한데 동굴과 장산범의 비주얼, 드라마의 연출이, 이 영화가 의도한 공포와 슬픔을 극대화하는지는 의문이다.
“그 두 감정을 함께 가져가면서 균형을 맞춘다는 게 쉽지 않더라. 공포와 슬픔은 결이 많이 다른 감정이라, 한쪽을 강조하면 다른 한쪽이 약해지는 느낌이어서 후반작업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다.”

'장산범' 스틸컷

'장산범' 스틸컷

―마지막 순간, 희연은 남편의 손을 잡고 장산범의 동굴에서 벗어날 것인가, 여자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다시 동굴로 들어갈 것인가. 그 선택이 꽤 대담하다.
“오르페우스도 결국은 뒤를 돌아보지 않나. 이런 이야기의 원형은 그 결말이 비극이다. 한데 그것이 아주 복합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장산범’ 역시 희연의 마지막 선택을 섬뜩하게 혹은 슬프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아이를 잃은 엄마와,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가 서로를 끌어안는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계속 공포·스릴러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무서운 이야기, 괴담을 좋아했다. 어두운 이야기를 편하게 느끼는 성향이라고 할까.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웃음).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기보다, 무엇에 끌리는 동시에 그것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분위기, 그런 복합적인 정서에 끌린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모비온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