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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25주년]코드네임 '동해' 권병현 전 대사 “양국 관계 숙명적, 사드가 막는 것도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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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현 전 중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이자, 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무악동 미래숲 사무실에서 한ㆍ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권병현 전 중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이자, 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무악동 미래숲 사무실에서 한ㆍ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1992년 4월 13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과 이상옥 외무부 장관이 극비리에 만났다. 6·25전쟁 이후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있는 두 국가의 외교 수장들이 얼굴을 맞댄 것 자체가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 이야기가 길게 오가지도 않았다. 두 장관은 만남을 끝낼 무렵 합의했다. “담판 대표를 한 사람씩 임명합시다.”

수교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았지만, 이 만남이 한·중 수교 협상의 신호탄이었다. 같은 시간 양상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은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에게 “한국과의 수교 시점이 다가왔다”고 알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임명된 ‘담판 대표’가 권병현(79·사진) 전 주중 대사였다.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양국관계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권 전 대사를 만났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은 ‘옥동자’인 한·중 관계가 최근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로 갈등에 빠진 것을 그는 “너무나 슬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한·중 관계는 숙명적인 것”이라며 “사드가 이런 숙명적 관계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밝은 미래를 자신했다.

외교 원로인 그가 최근에는 한·중 청년들과 함께 중국 사막 지대에 나무를 심는 환경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도 이런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그가 대표로 있는 ‘한중문화청소년협회-미래숲’의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약 1시간 30분 동안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중 수교는 세계를 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는데.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89년 6·4 천안문 사태의 유혈 진압으로 서구 자본의 대탈출이 이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덩샤오핑이 한국과의 수교를 결심한 것 같다. 그러면서 ‘무해양득’이라고 했다. 양득은 중국 경제에 좋고, 중국 통일에 좋다는 뜻이었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면 외교적으로 대만을 흡수하기 용이해질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것 같다.  
협상 준비는 어떻게 진행됐나.
이상옥 장관이 첸치천 부장을 만난 뒤 돌아와서 저를 담판 대표로 임명하며 ‘극비사항이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해치우라’고 지시했다. 기밀로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갑자기 신정승 동북아2과장이 병이 나서 입원을 했다고 하고 우리 집으로 왔다. 김석우 아주국장은 자정 넘어 우리 집과 이상옥 장관이 있는 곳을 왔다갔다 했다. 안가를 배정받아 준비했고, 5월12일 첫 협상을 앞두고 6명의 대표단을 꾸렸다. 작전명은 ‘동해’라고 지었다.  
왜 동해라고 했나.
서해라고 했다가 새어나가면 중국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 같아서였다. 동해라고 하면 일본은 생각해도 중국일 것이란 생각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권병현 전 중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이자, 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무악동 미래숲 사무실에서 한ㆍ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권병현 전 중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이자, 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무악동 미래숲 사무실에서 한ㆍ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첫 협상은 어땠나.
대표단을 세 팀으로 나눠 한 팀은 도쿄, 한 팀은 톈진, 한 팀은 홍콩을 통해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댜오위타이에 협상하러 들어갔더니 중국 대표는 종이 한 장 놓고 앉아서 수교라는 단어도 안 꺼내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양국관계를 가일층 발전시키기 위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선 한국이 대만과 관계를 끊는 문제부터 이야기하자’고 했다. 절대 안 된다고 했더니 그냥 돌아가라고 하더라.
처음부터 결렬 위기에 봉착한 것인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협상이었다. 중국 측에 ‘배후에서 지시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못 돌아간다’고 버텼다. 그제서야 쉬둔쉰(徐敦信) 부부장이 나왔다. 그냥 이야기해봤자 평행선만 달릴 것 같아 마오타이를 준비시켰다. 양쪽 대표단 모두 대취한 다음에야 조금 마음을 열고 계속 협상을 하자고 의견 일치를 봤고, 2차 협상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한ㆍ중 수교의 1등공신은 마오타이다.
결국은 대만과의 단교가 가장 큰 쟁점이었을 텐데.
처음에는 물론 안 된다고 했다. 격리된 서울 워커힐 호텔 VIP룸에서 열린 마지막 3차 협상에 가서야 그 문제에 대한 솔직한 담판이 이뤄졌다. ‘중국이 북한과의 혈맹을 끊어야 우리도 대만과 단교한다’고 했더니 중국 대표단이 ‘혈맹을 끊으려고 하니 한국과 수교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사흘을 걸려 양 측의 안을 합쳐 초안을 만들었다.  
한국으로서도 결단이었는데.
대만과의 단교 문서를 직접 만들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하나의 한국'을 위해 '하나의 중국'과 교환을 한 것이었다. ‘중국의 통일이 중요하면 우리의 통일도 중요하다. 우리는 대만과 단교할 테니 너희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만은 보장하라’는 것이 수교의 핵심이었다.
권병현 전 중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이자, 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무악동 미래숲 사무실에서 한ㆍ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권병현 전 중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이자, 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 대표가 10일 오후 서울 무악동 미래숲 사무실에서 한ㆍ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중국은 북한에 이를 어떤 식으로 통보했나.
7월15일 첸치천 부장이 양상쿤 주석의 친서, 사실상 덩샤오핑의 친서를 들고 평양을 방문했다. 하지만 눈치를 챘는지 김일성이 피해서 묘향산으로 갔다. 첸 부장은 묘향산까지 가서 친서를 전달했다. 역사상 북·중 간에 가장 냉랭하고 짦은 만남이었다고 한다. 이 때 김일성이 ‘중국이 중국식대로 하는 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조선도 조선식대로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혈맹이 깨졌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선택한 조선식이 바로 핵 개발의 시작이었다.
수교 25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텐데. 특히 지금 사드 문제로 갈등이 깊다.
우리 신정부 출범 다음날인 지난 5월11일 베이징에서 당시의 수교 주역 원로들이 모두 모였다. 25주년을 그냥 지나갈 수는 없어서였다. 그 자리에서 ‘참 슬프다. 이게 뭡니까’라고 했다. 그랬더니 중국 인사들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답하더라. 그게 사실 중국의 속마음이라고 본다. 어색한 게 좀 남아 있어도 관계 회복을 바란다. 중국이 그렇게 태도를 바꿀 때 우리가 레드카펫을 깔아주진 않더라도 야유하거나 삐딱하게 볼 필요도 없다. 나도 ‘해는 또 뜬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25년 만에 우리는 다시 마오타이를 나눠마셨다.  
지금의 사드 갈등이 양국관계에 깊은 상처로 남지 않을까.
한국과 중국은 숙명적 관계로 연결돼 있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그 관계가 약 한 세기 동안 인위적으로 끊어졌다가 수교로 다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확 봇물이 터져서 비약적 발전을 한 것이다. 이 정도 발전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숙명적 관계를 사드가 막는 것도 한계가 있다.
권병현 전 대사가 대표로 있는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은 중국 사막 녹지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지난 5월 중국 내몽고 자치구 쿠부치 사막에서 이뤄진 나무심기 봉사활동에는 한중 청년들이 참석했다. [사진 미래숲]

권병현 전 대사가 대표로 있는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은 중국 사막 녹지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지난 5월 중국 내몽고 자치구 쿠부치 사막에서 이뤄진 나무심기 봉사활동에는 한중 청년들이 참석했다. [사진 미래숲]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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