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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해방공간 임시정부 요인들도 이해 못할 2017년 ‘건국’ 논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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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로 정치권에선 ‘건국절’ 논란이 한창이다. 문 대통령은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라며 건국 기준은 해방 후 정부수립이 아니라 임시정부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가 1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1948년 건국 주장은) 마약 주사를 맞는 것”, “친일 4대 세력을 역사의 주역으로 다시 세탁하는 작업”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등 각종 기록을 통해 나타나는 ‘해방 공간’은 이 같은 인식과 적잖은 거리가 있다. “이승만 박사는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 1주년 식전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내방하라고 초청하였다” (1949년 7월 29일 자 경향신문 1면)는 보도가 대표적이다.

당시 주요 인사들의 언행을 따라가 봤다.

①백범 김구 등 임정 요인들=해방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도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인식했다는 정황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은 1946년 12월 8일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했다. 건국 과정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한 단체였다. 1948년 3월 1일엔 ‘良心建國(양심건국)’이라는 휘호를 쓰는가 하면 정부가 수립되고 4개월가량 지난 그해 12월엔 ‘건국기념사업회’라는 단체를 발족하고 고문을 맡았다.

1946년 1월 6일자 동아일보. 김구 선생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실려있다.

1946년 1월 6일자 동아일보. 김구 선생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실려있다.

임정을 이끌었던 이시영 초대 부통령도 1948년 부통령 취임 연설에서 “건국흥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임정은 1941년 ‘건국강령’을 발표했는데, 향후 건설할 새 국가에서 펼칠 정책을 망라했다.

김구 선생이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8년에 쓴 휘호. '양심건국'

김구 선생이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8년에 쓴 휘호. '양심건국'

②몽양 여운형과 ‘건준’=해방공간에서 임정과 라이벌 관계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4년 8월 ‘건국동맹’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조직했다. 당국의 삼엄한 감시 속에 농민동맹, 부인동맹, 각급 학생단체 등을 규합해 군사활동까지 계획했다. 이같은 활동은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 결성으로 확대 재편됐다. 학계에선 몽양의 건준에 대해 “국내에서도 외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독립과 건국을 준비한 사례”로 긍정 평가하는 의견이 다수다.

여운형이 주도해 1945년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KBS 캡쳐]

여운형이 주도해 1945년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KBS 캡쳐]

김대중 전 대통령도 건준 목포지부에서 활동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이제부터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즉시 참여했다”고 적었다. 몽양에 대해선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독립운동 서훈 2급)을 준데 이어 퇴임 직전인 2008년 2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급)을 수여했다.

③해방공간 사회 단체들=1946년 6월 19일 열린 전국부인대표대회에서는 이승만·김구 등 대표적 독립운동 인사를 초청해 열린 결의대회였다. 전북 대표로 참석한 한 참가자는 “건국운동에 분골쇄신해 이 박사와 김구 주석의 뒤를 받들겠다”고 말했다. 8·15 이후 결성된 사회단체 중에서는 1949년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조선건국청년회를 비롯해 ‘건국’을 내건 단체들이 적지 않았다.
또 신문에서는 김구가 머무른 경교장을 찾아와 ‘건국성금’을 기탁했다는 기사가 종종 실리곤 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취임 당시 ‘대한민국 30년’을 강조했던 것과 1919년 임정 시절에 일왕에게 보낸 건국 통보문을 근거로 당시 초대 정부가 건국 시점을 1919년으로 상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948년 5월 31일 서울 세종로중앙청 회의실에서 이승만 당시 의장(가운데)이 제헌국회 개원사를 하고 있다. 총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은 한 달 반 뒤인 7월 17일 제헌 헌법을 공포했다. 아래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전시된 제헌헌법 전문 조형물. [중앙포토]

1948년 5월 31일 서울 세종로중앙청 회의실에서 이승만 당시 의장(가운데)이 제헌국회 개원사를 하고 있다. 총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은 한 달 반 뒤인 7월 17일 제헌 헌법을 공포했다. 아래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전시된 제헌헌법 전문 조형물. [중앙포토]

또 제헌 헌법 전문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란 문구가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임정을 앞세운 것은 남북 분단은 물론 백범 등 일부 세력이 제헌의회에 불참했던 대내외적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일왕에게 보낸 건국통보문은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부당성을 지적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제헌 의회에 이승만 계열이 많이 참여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독립운동 세력들 중에서 임시정부에 지분이 없었던 좌익계는 ‘건국’에 방점을 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9년 2월3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2의 건국 한마음 다짐대회'에 참석, 치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9년 2월3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2의 건국 한마음 다짐대회'에 참석, 치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4월 20일 김대중 정부가 설립한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결성식이 20일 오후2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중앙포토]

1998년 4월 20일 김대중 정부가 설립한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결성식이 20일 오후2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중앙포토]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건국절’ 논쟁은 한 쪽의 손을 쉽게 들어올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여당은 문 대통령의 ‘1919년 건국’에 동조한다. 그러나 불과 19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에 ‘건국 50주년’을 크게 기념했을 때에도 동조했었다. 야당은 문 대통령이 ‘1919년 건국 원년’을 주장하는 이유가 임기 중 건국 100주년 행사를 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1948년 건국’을 강조한 정치적 배경이 진보의 반발을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이번 논쟁을 두고 “정치권 모두가 패배자가 됐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일본강점기 하에서 모든 것을 걸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열사들은 해방 후 70년이 지난 뒤 조국에서 이런 논쟁으로 국론이 분열되리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당시 자신들이 논쟁했던 걸 70년 후손들도 되풀이하리라는 걸 예상했을까.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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