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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3) 1등 기업 공장장도 퇴직 후엔 분노조절 장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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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광고인이었다가 IMF 때 35세에 강제로 잘려 일찌감치 백수생활을 경험했다. 이른 나이에 그런 험한 꼴을 당하면서 월급쟁이에 염증을 느끼고 PC방 창업, 보험설계사 등 자영업 세계를 전전했다. 지금은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로, 저술과 강의를 통해 은퇴의 노하우와 정보를 알리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도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건 행운이다. 평생 현역으로 사는 방법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그림 김회룡]

[그림 김회룡]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아뿔싸, 늦었다!” 정신없이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안쓰럽게 나를 보고 있다. “그렇지, 나는 어제 퇴직을 했지.” 28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버릇이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자 '낙관 → 의기소침 → 불안 → 분노' 감정 변화 #정부의 퇴직자 지원프로그램 이용하면 감정 극복 도움돼

김성호(55) 씨는 어제 28년간 근무하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함께 입사했던 동기들보다 몇 년 더 버텼고, 또 회사에서 공장장까지 했으니 남들에 비하면 괜찮다고 위안도 했다. 그래도 그만두는 과정에서 회사가 보여줬던 모습이 배신감까지는 아니어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얽매인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한마디로 시원섭섭한 마음이었다.

퇴직한다는 것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자기 분야에서는 1등 기업의 공장장으로 있으면서 착실하게 경력을 관리했고, 또 관련된 최고의 교육도 받았기에 눈높이만 낮추면 갈 곳은 많다고 생각했다. 일단 평소에 동경했던 것부터 해보았다. 늦잠을 자고 그냥 멍때리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은 매일 영화 두 편씩 본 적도 있었다. 아내와 꼭 가보고 싶었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도 다녀왔다. 주변 지인들이 새로운 직장을 소개해줬으나 일단은 즐기자는 생각에 재취업은 뒤로 미뤘다.

사도 야고보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순례객들. [사진제공=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도 야고보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는 순례객들. [사진제공=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이렇게 지내다 보니 석 달이 후딱 지났다. 처음에는 편했다. 시간이 가면서 아침에 아파트 현관을 나오니 퇴직 전에는 보지 못했던 노란색 어린이집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동네 아줌마들의 눈길을 의식하게 되고, 등교하는 아이들한테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부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전 직장 동료의 재취업 제안 뿌리쳐 

그러던 어느날 전 직장 동료로부터 조그만 회사에서 공장장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썩 내키지 않았다. 회사도 너무 작고, 급여도 생각했던 것 보다는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느니 뭐해, 일단 가고보자’라는 생각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았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충격이었다. 떨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소개한 사람에게 확인해 보니 그 자리에 30명이 지원했고, 스펙이 김성호씨보다 좋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력서를 다시 정리하면서 자기소개서에 경력을 멋지게 포장해 써넣었다. 부지런히 10곳, 20곳 지원을 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냉혹한 구직시장의 현실을 느끼면서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60 시니어 일자리 한마당' 행사장을 찾은 시니어들이 채용 기업 게시판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 김춘식기자

'60 시니어 일자리 한마당' 행사장을 찾은 시니어들이 채용 기업 게시판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 김춘식기자

꾸준히 이력서를 넣어 보았지만 커리어나 스펙 같은 것은 문제가 안됐다.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5개월 동안 70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까지 간 경우는 4곳에 불과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한참 학교를 다니고 있고, 조금 있으면 결혼도 시켜야 한다. “정작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라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반복되는 구직의 실패, 이에 따른 불안과 초조는 분노로 변했다.  본인이 원해 퇴직했음에도 전 직장에 대한 분노감이 나타났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경력을 묵히기 아까와 많은 돈도 필요 없고 그냥 거마비나 주면 좋겠다는데, 이런 기회조차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분노가 밀려왔다.

정부의 전직지원프로그램들  

위 사례는 2013년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사무직 베이비부머 퇴직 설계 프로그램 개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무직으로 퇴직한 근로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초점집단면접(Focus Group Interview) 결과를 재구성한 것이다.

퇴직 이후 정서적 반응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면 ‘낙관 → 의기소침 → 초조와 불안 → 분노’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영원히 취업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심한 트라우마가 걱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 변화는 정년퇴직을 비롯한 자발적 퇴직자나 정리해고 등 비자발적인 퇴직자나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심리적·정서적인 문제는 기업에서 퇴직 전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다루기도 하지만 근로자들에게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외국계 기업이나 중견기업 이상으로 극히 제한적이다.

워크넷 '장년' 메인 페이지. [사진 워크넷 홈페이지 캡쳐]

워크넷 '장년' 메인 페이지. [사진 워크넷 홈페이지 캡쳐]

대신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성실프로그램’ ‘재도약 프로그램’ ‘장년나침반’등이 그것으로, 주로 전직과 재취업과 관련된 교육이다. 그렇지만 변화관리, 대화방법, 재무관리, 화 다스리는 법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돼 있어 이러한 변화가 나 혼자 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겪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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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심리적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고, 자연스럽게 실용적인 정보가 교환되기도 한다. 이들 프로그램은 고용노동부 워크넷(www.work.go.kr)을 방문해 ‘장년’메뉴를 클릭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또 지자체별로도 이런 저런 전직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테면 인천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인천 경총에서 시행하는 ‘인천지역 전직 아카데미’가 한 예다.

박영재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zang1@naver.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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