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5만원의 의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열아홉 살 젊은 여성이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1년이 넘게 스토킹을 당했다. 사귄 기간은 겨우 6개월 남짓했다 하니 둘이 만난 기간의 두 배가 넘는 시간 동안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의 대가는 매우 컸다. 헤어지자는 통고를 받은 스물일곱 살의 남성은 어린 여자친구가 왜 자기를 떠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자존심이 상했다고 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전화를 계속 걸고, 뒤를 밟고, 자동차에 추적장치를 설치하고, 심지어는 집 열쇠를 훔치기도 했다. 피해 여성은 여러 차례 신고했지만 경찰은 그리 대단한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데이트폭력 지구촌 확산 … 목숨 잃는 여성도 늘어나 #여성게이머 집단폭력에 고작 범칙금 5만원인 현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아마도 어떤 결말이 있었던 것인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몹시 떨떠름한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불길한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 결국 이 남성은 여성의 집에 침입해 칼로 그녀의 목을 그어 죽여버렸다. 경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 여성에게 벌금을 물렸다! 남성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휴대전화기를 잡아챘다고 피해 여성이 신고했을 때 두 사람이 사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여성이 밝히지 않아 ‘경찰 조사 시간을 낭비하게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살인이 벌어지기 약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지난해 여름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위 선진국도 참말로 별수 없다 싶다. 그저 ‘데이트 폭력’이란 어떤 사회에서든 일어나는 것이며,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염산을 던져 여성의 얼굴을 녹아내리게 하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파키스탄이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여성이 처해 있는 위험에는 별반 차이가 없으며, 또한 이렇게 부당하게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이란 참으로 안일하기 짝이 없다는 체념에 깊이 빠진다.

이게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고 위안 삼을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바로 얼마 전 다른 사람 만나는 것 아니냐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맞아 의식불명에 빠진 여성이 끝내 사망했다. 지난달에는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무차별 폭행하고 트럭을 몰아 위협하는 남성이 폐쇄회로TV(CCTV) 영상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이 남성은 술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니 예의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을 이유로 형의 감경을 받게 되려나. 피해 여성은 치아 5개를 잃었지만 그나마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국에서 데이트 폭력, 즉 사귀고 있거나 사귄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해 숨진 사람의 수는 연간 46명에 이른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무수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듯하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데이트 폭력 실태를 조사한 결과 데이트 상대로부터 신체적 피해를 당했다고 응답한 188명 가운데 “경찰에 신고했다”는 경우는 겨우 8.5%에 그쳤다.

영국 법원은 이 글 첫머리의 사건을 판결하면서 “경찰이 안일하게 대응했고 피해자를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취급했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또한 경찰의 처사는 범인으로 하여금 스토킹을 한다 한들 큰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게끔 했다고 지적했다. 경찰감독위원회(IPCC)는 해당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며칠 전 한국에서 남성 유튜버들이 한 여성 게이머를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걸 생중계한 일이 있었다. 이 여성 게이머가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해당 여성 게이머로 추정되는 이를 겨냥해 “곧 잡으러 가겠다”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 심지어 “찢어 죽이겠다” 같은 폭언을 여과 없이 방송하고 직접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이 여성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한국 경찰의 처분은 범칙금 5만원이었다.

5만원이라. 이 어처구니없는 살해 협박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수천 명의 시청자에게(상당수는 청소년들이다), 또 이 뉴스를 접한 수많은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이 5만원이 느끼게 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