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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김정은에게 완패한 ‘화염과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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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결론부터 말하면 트럼프는 ‘수’에서 김정은에게 졌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렇다. ‘화염과 분노’ ‘군사행동 장전 완료’ 운운하며 당장에라도 공습에 나설 것처럼 큰소리쳤지만, 김정은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트럼프 ‘블러핑’ 따로 놀며 효력 상실 #대북카드 소진, ‘차악’향한 협상 불가피

‘블러핑(허세)’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상대방이 “어, 이거 장난 아닌데…”라 믿게끔 할 정황들이 갖춰져야 한다. 사업도, 도박도 그렇다. 그런데 정작 사업가 출신 트럼프는 이걸 못했다. 따로따로였다. 워싱턴포스트가 그걸 정확히 짚었다. 첫째, 조셉 던퍼드 미 합참의장이 당초 예정대로 한·중·일 3국 순방 계획을 떠났다. 트럼프 말대로 전쟁이 임박했다면 그럴 틈 따윈 없다. 둘째, 북한 압박을 위해 한반도 주변에 머물던 항공모함 로널드레이건이 오히려 지난주 일본 요코스카 기지로 돌아갔다. 한반도 군사행동을 앞두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내 미국인 20만여 명에게도 아무런 대피 명령이 없다. 게다가 국방·국무장관 모두 ‘트럼프 레토릭(수사)’과 따로 놀고 있다. 말만 요란한, 정치하지 못한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손에 쥔 김정은이 속을 리 없다. 압박용 꼼수임을 금세 눈치챘다. 그러니 초강공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사이 세계 증시에선 1700조원이 날아갔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군사적 긴장이 감돌던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장관이던 윌리엄 페리의 최근 고백이다.

“우리는 한 번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헛된 위협(empty threat)’을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침묵했다. 그 타이밍에 외교 거물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워싱턴포스트에 ‘크루즈 미사일로 북한을 공격하라’고 촉구하는 칼럼을 실었다. 김일성은 내가 그 글을 쓰게 한 걸로 여겼다. 선제타격 준비가 임박한 것으로 본 것이다. 며칠 뒤 북한은 협상에 들어왔다.”

68년 1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군사행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다 전격적으로 동해에 함대와 전투기 100대를 보냈다. 동시에 소련에 ‘군사행동 임박’이란 허위 정보를 흘렸다. 그걸로 승부는 끝. 협상은 바로 타결됐다. 언어의 자중 속에 협상력은 배가된다. 트럼프 완패의 이유다.

말 폭탄 대결은 트럼프의 ‘대북 카드’가 소진됐음을 드러냈다. 역설적으로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 오바마 정권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수전 라이스가 “미국·한국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확증을 받으면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해주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략적 인내’의 장본인이 그런 말을 하다니 괘씸하다. 하지만 의미심장하다.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한반도 전문가 패트릭 크로닌은 트럼프가 그동안 ‘그 자(he)’라 호칭하던 김정은을 지난주 처음으로 ‘Kim Jong-Un’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에 주목한다. 판이 바뀌고 있다.

미국·북한 모두 눈치 보며 협상을 주저할 때 우리의 역할이 있다. 주도권은 못 쥘망정 어떻게든 북·미 간 접점을 위한 어시스트라도 해야 한다. 이달 예정된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규모 축소도 우리가 먼저 나서면 미국이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북한이 가장 원하는 것일 수 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제는 핵보유국 북한과 어떻게 공멸하지 않고 공생하느냐 치열하게 궁리해야 할 시점이다. 오늘 광복절 메시지가 주목되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상황에 외교장관이 ‘문재인식 휴가 문화’ 운운하며 휴가를 떠났다 급거 복귀했다니, 이 정권의 안이한 인식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