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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거나 뜨겁거나…강남역 사건 이후 변모한 여성 예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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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으면 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포부를 밝힌 여성 토크쇼 '뜨거운 사이다'. 방송인부터 변호사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여성 6인이 사회, 정치, 문화 등의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온스타일]

"할 말이 많으면 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포부를 밝힌 여성 토크쇼 '뜨거운 사이다'. 방송인부터 변호사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여성 6인이 사회, 정치, 문화 등의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온스타일]

26 대 4. 현재 지상파ㆍ유료 채널 예능 중 진행자와 고정 패널이 모두 남성 혹은 여성인 프로그램 수다. 그마저도 ‘겟잇뷰티’나 ‘스타일 팔로우’ 등 메이크업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비디오스타’'뜨거운 사이다'만 남는다. 그러니 “출연할 예능이 없다”는 개그우먼들의 볼멘소리는 과장이 아니다.

'뜨거운 사이다' 씨가 마른 여성 예능 부재 지적 #브라 체험 등 실험 접목한 젠더쇼 '까칠남녀' 선전 #게스트 맞춤 '비디오스타'는 충격 고백 성지 부상 #여성혐오 범죄 반작용으로 새로운 도전 이어져

지난 3일 시작한 온스타일 예능 ‘뜨거운 사이다’는 아예 첫 회 주제를 ‘여성 예능의 부재’로 정하고 정면돌파했다. ‘걸크러시’의 선두주자인 김숙을 필두로 박혜진 아나운서ㆍ영화배우 이영진ㆍ김지예 변호사 등 할 말은 하는 언니들이 총출동한다. 김기덕 감독을 비롯한 영화계 성폭력 문제가 불거지자 “나도 촬영 첫날 전라 노출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는 이영진의 고백은 새로운 이슈 토크쇼의 탄생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영화계 성폭력 논란이 일자 자신의 경험담을 밝힌 영화배우 이영진. [사진 온스타일]

영화계 성폭력 논란이 일자 자신의 경험담을 밝힌 영화배우 이영진. [사진 온스타일]

이를 두고 여성판 ‘썰전’ ‘알쓸신잡’이라는 비교가 이어지자 문신애 PD는 “정치 이슈를 보수와 진보로 나눠 설전을 벌이는 것과 달리 사회ㆍ정치ㆍ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며 “왜 우리에겐 늘 하나의 사전밖에 없는지 모르겠다. 더 많은 사전을 만들겠다는 의무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만들겠다”고 밝혔다.

“여성 예능은 안된다”는 세간의 인식에 반기라도 들듯 터져 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성장통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드러난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문단 등 각계로 확산된 해시태그 운동의 여파가 가장 대중적인 문화 영역인 TV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공감을 얻으면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한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여성 PD와 작가가 주축이 된 제작진은 보다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까칠남녀'에서 브라 체험을 한 봉만대 영화감독이 그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다. [사진 EBS]

'까칠남녀'에서 브라 체험을 한 봉만대 영화감독이 그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다. [사진 EBS]

가장 독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EBS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다. 영화감독 봉만대ㆍ기생충학자 서민ㆍ시사평론가 정영진 등 남성 패널이 출연하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끌고 가는 것은 박미선ㆍ서유리 등 여성 패널이다. 브래지어가 이슈가 되면 여성은 노브라로, 남성은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녹화에 임한다. 산부인과 진료실로 변신한 세트에서 강제 '쩍벌' 자세를 취하게 된 남성 출연진은 “너무 수치스러웠다”(서민)거나 “굴욕당하고 지배당하는 느낌”(봉만대)이라고 고백한다. 지극히 보통 남자의 눈높이에서 직접 체험을 통해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삼색토크 여자’ 이후 EBS에서 14년 만에 만들어진 젠더 토크쇼”라며 “그간 칼럼과 논문 등에서 주로 얘기되던 내용이 TV로 옮겨와 동시대적 이슈들이 짤 등으로 소비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환영했다.

'비디오스타' MC들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꼴통령 5인방' 특집에 맞춰 준비한 콘셉트. [사진 하리수 인스타그램]

'비디오스타' MC들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꼴통령 5인방' 특집에 맞춰 준비한 콘셉트. [사진 하리수 인스타그램]

반대로 편안함을 무기로 내세운 경우도 있다. 지난해 7월 MBC에브리원에서 박소현ㆍ김숙ㆍ박나래ㆍ전효성을 내세운 ‘비디오스타’가 시작했을 때 이들의 롱런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MBC ‘라디오스타’의 포맷을 그대로 따온 스핀오프로 과연 더 독하고 더 웃긴 토크쇼가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편안하게 친구들과 수다떨 듯 놀다 가면 된다”는 말로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 출연자들을 안심시켰다. 그 결과 국내 첫 트랜스젠더 연예인으로 이혼한 하리수나 몸캠 유출로 홍역을 앓은 서하준 등 ‘비디오스타’에서만 볼 수 있는 충격고백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화제성 강자로 떠올랐다.

이유정 PD는 “한번 출연했던 분들이 다른 출연자에게 출연을 권하는 등 다단계같은 매력이 있다”며 “예를 들어 박수홍씨가 출연하면 게스트 취향에 맞춰 대기실에 사이키 조명을 가져다 놓고 대본 리딩 때도 작가가 춤추면서 들어가는 등 작지만 세세한 준비에 감동해 다시 찾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까칠남녀'에서 산부인과 체험을 하고 있는 남성 패널들. [사진 EBS]

'까칠남녀'에서 산부인과 체험을 하고 있는 남성 패널들. [사진 EBS]

이같은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적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존 여성 예능이 실패한 이유는 남성 중심의 포맷에서 출연진만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썰전’ 이후 이슈 중심의 토크쇼가 주목받는 가운데 여성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등장은 바람직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나 혼자 산다’ ‘효리네 민박’ 등 관찰 카메라형 예능에서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자연스럽게 가치관을 전달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신선하다” “유익하다”는 호평과 달리 ‘까칠남녀’ 프로그램 게시판에는 꼴통 페미니스트 지향이라며 비꼬는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나 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 이용자를 동물에 빗대 비하하는 “메퇘지” 등의 글도 여럿이다. 이에 김민지 PD는 “한국 사회에서 젠더 문제는 여성에게 불평등한 것들이 너무 많아 우선적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며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만큼 향후 역차별이나 가장으로서 책임감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다뤄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핫한 이슈가 항상 발생하진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반복될 수밖에 없겠지만 같은 주제라도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고 꾸준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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