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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수록 노래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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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29면

공감 共感

한반도 전쟁 위기 시나리오 뉴스들 사이에서 우연히 접한 반가운 소식에 위로를 얻는다. 지난 8월 10일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서 ‘길원옥의 평화’란 이름으로 발표된 음반 소식이 그렇다. (이 칼럼에도 소개했던) 다큐  ‘어폴로지’(2016, 티파니 슝)의 명장면으로 길 할머니가 노래 부르던 모습을 묘사했던 것도 떠오른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세계에 알리는 여정에 들어선 길 할머니가 창밖 풍경을 보며 부르던 ‘한 많은 대동강’이 음반 대표곡으로 소개된다. 길 할머니가 외지 호텔에서 잠시 쉬면서 활동가들과 함께 노래 부르던 장면은 자가 치유의 뭉클함을 전해 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음반 '길원옥의 평화' 낸 길 할머니 #오는 14일 청계광장 무대서 공연 #노래는 오랜 자기표현, 소통 수단 #노래의 힘 보여준 실화영화 많아

노래로 고달픈 인생길을 달래시던 길 할머니가 애창곡 15곡이 담긴 평화 앨범을 들고, 세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인 8월 14일 청계광장 무대에 설 예정이다. 그 소식을 전하는 기자회견에서 길 할머니는 이렇게 털어놓으신다. “90살 먹은 늙은이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노래한다고 생각하면 어떨 때는 좀 나이 먹어서 주책 떠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런 소회 속에서 억압의 흔적이 가늠된다. 21세기 들어, 연예인 되기 과잉 열풍이 푸는 한반도 남쪽이건만, 자기 표현의 억압이 아직도 작동하는 흔적을 우연찮게 발견하기 때문이다.

2013년 광주 트라우마센터 강연의 강렬한 경험도 같은 코드로 연결된다. 강연을 준비하는 내겐 고통을 이겨 내는 예술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부장적 억압으로 저질러진 범죄로 감옥에 간 여성들이 구성해낸 합창단을 다룬 극영화 ‘하모니’ 그리고  정쟁으로 얼룩진 콩고에서 장애인 악단을 조직한 이들이 세계로 나가는 과정을 음악 취재기자들이 기록한 ‘벤다 빌릴리’ 등을 같이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래의 힘을 짜릿하게 공감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영화보기의 감흥 덕일까?

강연의 핵심이기도 한 관객과의 대화 자료를 찾아보니 그때 그 기록이 내겐 현장중계 다시보기처럼 다가온다. 광주민주화항쟁으로 가족의 죽음과 구속 등으로 고통스럽던 여성들이 무등산 꼭대기에 올라 같이 노래하며 연극적으로 고통풀이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제는 죽겠다고 악쓰고 이제는 노래 부르고 그러면…아이고 저 양반들이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그런 욕망을 참아 내며 힘들었다는 고백이었다. 그런데 아픔을 노래로 푸는 영화들을 보며, 그것이 예술-놀이로 푸는 인생길이란 점을 공감한다는 전복적 발견의 토로는 강렬한 격려로 남아 있다.

너무 고통스럽기에 노래하는 여성은 영화 ‘그을린 사랑’ (2010, 드니 빌뇌브)에도 나온다. 실화를 토대로 만든 이 작품은 어머니 나왈의 유언에 따라 쌍둥이 자녀가 가족의 비밀을 탐구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나왈은 팔레스타인 무슬림과 사랑에 빠져 도망치려다 오빠들에게 들켜 명예살인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슬림 남자를 사랑해 금기를 깬 나왈을 꾸짖으며 구해낸 할머니는 산파역도 하며 그녀의 탈주를 돕는다. “공부해라, 똑똑해져야 해”라며 나왈을 격려해 도시로 보낸 할머니는 언젠가 아이를 찾아볼 수 있도록 발 뒤꿈치에 상처를 내 고아원으로 보낸다.

놀라운 반전과 전복의 시나리오 구조를 갖춘 이 작품의 챕터별 구성에서 ‘노래하는 여인’ 챕터는 나왈의 강인함을 보여 준다. 테러범으로 잡혀간 감옥에서 혹독한 성고문까지 당하면서도 나왈은 저항하며 노래한다. 그러면서 쌍둥이 자녀에게 ‘분노의 흐름을 끊어 내는 약속’ 을 당부하는 유언은 평화로 가는 길의 표지판을 지시한다.

영화 ‘노래로 쏘아 올린 기적’(2015, 하니 아부 아사드)도 철조망으로 봉쇄된 가자지구의 소년이 노래로 돌파하는 탈주여정을 보여 준다. 2013년 카이로에서 열리는 오디션 프로그램 ‘아랍 아이돌’에서 팔레스타인 난민 최초로 우승한 무함마드 아사프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어려서부터 4인조 꼬마 노래악단으로 알바를 하던 무함마드에게 누나는 강력한 동반자이다. 남녀차별 심한 관습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매우 활달한 소녀다. “네가 남자냐? 여자냐”라는 어른들의 핀잔을 들으며 세 소년과 함께 밴드를 구성한 누나는 불치의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기억세포에 살아남아 있는 누나는 그가 좌절할 때마다 재도전의 용기를 주는 정신적 지주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감옥 같은 삶을 노래하는 그를 생중계로 목격한 이들은 그를 ‘전쟁 아닌 평화 로켓’이라 불렀다. 그는 평화 노래꾼이 되어 유엔 난민 기구 친선대사로 임명된다.

음악 치료가 보여 주듯이 노래는 인류 문화 초기부터 언어 이전에도 존재해 온 자기표현과 소통의 수단이다. 그런 노래의 힘을 보여 주는 현실이 우리 일상 속에 있음을 실화 영화들로 만나 보시길 권한다.

유지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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