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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민호의 이렇게 살면 어때(9) “거창에서 처음으로 쓴맛을 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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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돌아가셨지만 내겐 백부님이 한 분 계셨다. 생전에 명절을 맞아 인사차 들르면 늘 이렇게 안부를 물으셨다.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대박 예감했다 헛발질 #광고쟁이는 눈칫밥 도사 #퇴직해도 눈치는 필수

“요즘 경기가 안 좋으니, 간판 만들 일은 많겠네. 많이 바쁘지?”

동네 치킨집 간판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보시고, 망한 치킨집 사장님에 대한 안타까움 보다 새로운 치킨집의 새로운 간판을 만들고 있을, 서울에서 광고한다는 조카가 떠오르셨던가 보다. 연세가 있으시니 광고를 간판 만드는 일 쯤으로 아셨을 거다.
하물며 카피라이터라고 하면…

이름도 짓고, 레이블 카피도 써 가조 영농조합 김 사장님께 보여드린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대박을 예감했지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쓴맛을 본 비운의 네이밍이 되고 말았다. [사진 조민호]

이름도 짓고, 레이블 카피도 써 가조 영농조합 김 사장님께 보여드린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대박을 예감했지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쓴맛을 본 비운의 네이밍이 되고 말았다. [사진 조민호]

요즘 이곳 거창 가조영농조합 김 사장님은 도라지 조청에 푹~ 빠져 계신다. 만드는 방법이 옆에서 보기에도 딱하다. 도라지를 달여 그 물을 섞어 만들어도 도라지 향이 배어서 누구도 도라지 조청을 개나리 조청이라고 안 할텐데 도라지를 말리고 가루로 내어 달여 만드니 도라지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라지 한 말을 말리고 가루로 빻아봐야 겨우 조청 한 병을 만든단다.

“그래야 도라지 맛이 깊어지거든예. 약효도 좋고예” 한다.

그 많은 도라지를 말리고 가루 내고 빻고 달이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를 받을 것이며, 누가 그 값 내고 사 먹을까 싶어 딱해 하고 있는데… “광고 하셨다면서예. 조청 이름 좀 지어주이소~” 하신다.
돌아가신 백부님 생각이 났다.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레이블 확대. [디자인 조민호]

도라버리지 도라지 조청 레이블 확대. [디자인 조민호]

잘 팔릴 거 같지 않나?
김 사장님의 고민과 고생, 좋은 도라지 조청을 향한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팍팍~
몇 만원 씩 주고서도 사 먹고 싶다는 느낌이 파바박~
며칠을 고민해 짜잔~ 하고 보여 드렸다.

김 사장님의 표정이 묘하다. 웃기는 하시는데 도라지를 날 걸로 씹어 드신 듯 하다.

회사에 다닐 때,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먼저 광고주의 표정에서 프레젠테이션의 성공과 실패를 읽어 낸다. 아이디어를 내는 일 보다, 사람들 표정에서 반응을 읽어 내는 일에는 광고쟁이가 도사다.

포월침두 마당에 도라지꽃이 피었다. 도라지 쓴 맛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예쁜 보라빛이다. [사진 조민호]

포월침두 마당에 도라지꽃이 피었다. 도라지 쓴 맛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예쁜 보라빛이다. [사진 조민호]

“사장님~ 농담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도라버리지’ 라고 짓자고 하겠습니까. 핫핫핫”

김 사장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술 한 잔 안 드시는 분이 앞에 놓인 맥주잔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아~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하는 속이 훤하게 보인다.
“얘한테 이런 거 부탁하면 안 되겠네” 하는 다짐도 보인다.

나 아직 눈치 빠른 광고쟁이 맞지? ㅋㅋ

조민호 포월침두 주인 minozo@naver.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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