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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취향] 기차 ‘덕후’가 말한다, 늦기 전에 타봐야 할 기차 여행 코스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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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다보니 박준규씨는 기차를 전문가 수준으로 찍는 아마추어 사진 작가가 됐다. 사진은 한국철도111주년 기념 제 1회 철도사진공모전(2010년)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구불구불 철길을 달리는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를 촬영했다. [사진 박준규]

기차 여행과 사진을 좋아하다보니 박준규씨는 기차를 전문가 수준으로 찍는 아마추어 사진 작가가 됐다. 사진은 한국철도111주년 기념 제 1회 철도사진공모전(2010년)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구불구불 철길을 달리는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를 촬영했다. [사진 박준규]

제 1회 철도사진공모전 입상작. 부제는 '우리 기차타고 어디갈까?' [사진 박준규]

제 1회 철도사진공모전 입상작. 부제는 '우리 기차타고 어디갈까?' [사진 박준규]

전국 기차역과 철도 시간표를 훤히 꿰고 있으며 1년 365일 중 200일 기차에 오르는 남자. 대전역·부산역 등 주요 기차역 역장을 형·동생으로 삼고, KTX 승무원과 반갑게 인사하는 청년.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꺼이꺼이 곡소리 내며 서러워할 '철덕(철도와 한 분야에 몰입하는 사람을 뜻하는 ‘덕후’를 합친 말)', 박준규(42)씨 얘기다.
철도여행 한 우물을 판 끝에, 박씨는 2013년 철도여행 가이드북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을 집필하며 철도여행 전문가로 성덕(성공한 덕후)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 여행 컨설턴트, 여행 모니터링 요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덕업일치(취미와 생업이 같다는 뜻)의 꿈을 이룬 이 남자의 여행 이야기, 아니 ‘덕질’의 역사를 물었다.

박준규씨는 관광열차를 운행하는 코레일관광개발의 자문 역할도 한다. 백두대간 협곡을 달리는 관광열차 V트레인에서. [사진 박준규]

박준규씨는 관광열차를 운행하는 코레일관광개발의 자문 역할도 한다. 백두대간 협곡을 달리는 관광열차 V트레인에서. [사진 박준규]

기차를 얼마나 자주 타요?
우리 집은 서울이고, 외갓집은 경북 문경이었어요. 어릴 적 서울에서부터 문경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도 신났고, 머리에 잔뜩 짐을 이고 타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정겨웠죠. 기차는 단순히 역과 역 사이를 오가는 교통수단이라기보다 이동하는 과정을 여행으로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졌잖아요. 그래서 기차에 빠졌고 대학교(가천대 94학번) 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차를 탔어요. 수업이 끝나면 곧장 기차를 타는 일이 많았는데 일주일에 대여섯 번 타는 때도 있었죠. 밥도 기차에서 먹고 시험공부도 기차에서 했어요. 1994년부터 기차표를 버리지 않고 모았는데 정확히 세보지 않았지만 2000장이 넘을 거예요. 내 기차여행의 증거이자 보물이죠(그는 자체 제작한 투명 비닐에 기차표 한 장 한 장을 넣어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1년에 150~200번 정도 기차를 타요.  
일일이 비닐에 싸서 보관하고 있는 기차 승차권. [사진 박준규]

일일이 비닐에 싸서 보관하고 있는 기차 승차권. [사진 박준규]

2000번 기차 타고 100만㎞ 여행한 기차 여행 전문가 박준규씨 #2004년 개통한 KTX 1호 승객, 기차표 수집하는 여행광 #원주~강릉간 KTX 개통 앞두고, 강원도 간이역 여행 추천

2000장이 넘는 기차표라. 가장 아끼는 티켓은요?
KTX 1호 승객이 바로 접니다. 2004년 4월 1일 개통한 KTX 승차권을 아직 갖고 있어요. (종이 티켓을 꺼내 보이며) 바로 이 티켓이에요. 오전 5시 30분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역으로 향하는 열차였죠.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KTX 1호 승객이 될 수 있었던 비법이 있어요. KTX 개통식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요. 오전 5시 15분 플랫폼을 개방했는데, 너도나도 카드를 찍고 먼저 입장하려고 하니 카드 인식기가 말을 안 들었어요. 그때 KTX표는 일회용 지하철 티켓처럼 마그네틱선이 있는 카드 형태였거든요. 나는 카드 인식기 말고 비상문을 통해 유유히 플랫폼에 입장했죠. 카드 대신 종이 티켓을 발급받은 덕분이었어요. KTX가 개통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여행사에서 도트 프린터로 출력한 종이 티켓을 샀어요. 종이 티켓은 KTX가 운행되고 몇 달 후 없어졌어요. KTX 1호 승객으로 방송사와 인터뷰도 하고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 서울역장과 악수도 했어요.
2004년 4월 1일 개통한 KTX 첫 차 승차권이다. 몇 십년 후에는 박물관에 전시될 지도 모를. [사진 박준규]

2004년 4월 1일 개통한 KTX 첫 차 승차권이다. 몇 십년 후에는 박물관에 전시될 지도 모를. [사진 박준규]

2004년 KTX개통식 중계 화면에 잡힌 박준규씨. KTX 1호 승객으로 '철덕'으로서 자존심을 한껏 세웠던 날이다.

2004년 KTX개통식 중계 화면에 잡힌 박준규씨. KTX 1호 승객으로 '철덕'으로서 자존심을 한껏 세웠던 날이다.

KTX 1호 승객으로 선정된 후 받은 기념품. 무임승차권 4매가 들어있었다. [사진 박준규]

KTX 1호 승객으로 선정된 후 받은 기념품. 무임승차권 4매가 들어있었다. [사진 박준규]

가장 자주 이용한 노선이 있나요?
청량리~정동진 구간이요. 이 노선은 400번도 넘게 탄 것 같아요. 오후 11시 25분 청량리역을 출발하면 다음날 오전 4시 28분 정동진역에 도착해요. 5시간 정도 무궁화호를 타고 기차여행을 하는 거죠. 운임은 딱 2만1100원이에요.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무박 2일 여행이 또 있을까요? 정동진 기차여행을 떠난다면 꼭 ‘안대’를 챙기세요. 비행기만 타는 사람들은 기차도 알아서 차내 소등을 하는 줄 알아요. 기차는 안전과 도난 방지 등의 이유로 운행 중 차내 조명을 안 꺼요. 안대를 끼고 눈을 붙이면 덜 피곤할 거예요.
박준규씨에게 기차여행의 낭만을 일깨워 준 청량리~정동진 구간. 사진은 정동진 바다에서 바라본 일출 장면. [사진 박준규]

박준규씨에게 기차여행의 낭만을 일깨워 준 청량리~정동진 구간. 사진은 정동진 바다에서 바라본 일출 장면. [사진 박준규]

기차여행 초보에게 추천하는 코스가 있다면요?
청량리~정동진 구간이요(웃음). 정동진은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에요. 동해와 기차역이 불과 50m 거리죠. 역에서 딱 내리는 순간 바다예요. 언제가도 좋아요. 겨울도 좋고 여름도 좋아요. 정동진 기차여행이라고 하면 밤에 출발하는 기차만 떠올리는데 청량리~정동진 열차는 주중 6대, 주말 7대 운행해요. 낮에 타보세요. 한적하니 운치 있어요. 정동진역 주변에 산책로도 있어요. 부채꼴모양 주상절리를 구경하면서 걷는 바다부채길이에요. 이 길 덕분에 1995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지로 뜬 이후, 정동진은 제 2의 중흥기를 맞은 것 같아요.

서둘러 정동진에 기차를 타고 가야할 이유가 있어요. 장담컨대 무궁화호를 타고 가는 이 낭만적인 기차 노선은 몇 년 안에 없어질 거예요. 올해 12월 원주∼강릉 구간에 KTX가 개통되잖아요. 이제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1시간 30분이면 주파하는 시대가 열려요. 속도와 편리함, 중요하죠. 근데 효율성만 추구하다 보면 놓치게 되는 가치가 많아요. 한국에는 추억이 어린 증기 기관차, 스위치백(경사가 가파른 구간에 지그재그 형태로 놓은 철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가는 기차를 경험할 수 있다)노선이 다 없어졌어요. 반면 일본에는 남아있어요. 강력한 문화 콘텐트가 됐죠. 주머니 가벼운 연인과 대학생의 여행 코스였던 청량리~정동진 구간의 완행열차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쩔 수 없이 사라지게 된다면, 없어지기 전에 한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정동진 기차여행의 추억을 공유하길 바라요.

짙푸른 동해바다와 정동진역, 그리고 무궁화호 열차. [사진 박준규]

짙푸른 동해바다와 정동진역, 그리고 무궁화호 열차. [사진 박준규]

원주역과 강릉역 구간이 KTX로 연결되면, 정동진역을 포함해 강원도 간이역을 오가던 무궁화호는 운행을 멈출 지도 모른다.[사진 박준규]

원주역과 강릉역 구간이 KTX로 연결되면, 정동진역을 포함해 강원도 간이역을 오가던 무궁화호는 운행을 멈출 지도 모른다.[사진 박준규]

‘우리나라에 이런 기차 여행 코스도 있었어?’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여행지도 추천해주세요.
기차등급에 따라 무궁화호·새마을호·KTX로 나뉘죠. 근데 우리나라에는 무궁화호 아래 ‘통근열차’라는 게 있어요. 옛날로 치면 통일호랑 비슷해요. 유일하게 경원선에 운행되고 있어요. 동두천역을 출발해 우리나라 최북단역 백마고지역으로 향해요. 1시간 30분 걸리는데, 단돈 1000원이에요. 백마고지역에서 내리면 한국 전쟁 흔적이 남아있는 철원의 안보관광을 즐길 수 있어요. 또 영주역~김천역을 연결하는 경북선은 아마추어 사진작가에게 추천하는 구간이에요. 선로가 110㎞ 정도 이어진 단선이에요. 구불구불한 선로 위를 완행열차가 오가죠. 한번은 기차를 타보고, 또 한 번은 자동차로 기차를 따라가 보세요. 선로 주변이 논밭이라 풍경과 어우러진 기차 사진을 담기 좋아요. 기차 속도가 느리다보니 12번도 넘게 기차를 추월할 수 있어요.
전국 기차역과 기차 시간표, 운임까지 훤히 꿰고 있는 박준규씨. 성공한 기차 덕후로 가이드북 저자이자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기차 여행 컨설던트다. [중앙포토]

전국 기차역과 기차 시간표, 운임까지 훤히 꿰고 있는 박준규씨. 성공한 기차 덕후로 가이드북 저자이자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기차 여행 컨설던트다. [중앙포토]

덕질의 끝은 뭘까요. 계획이 있다면요?
얼마 전 인터넷 정보를 보고 전남 고흥 나로호우주센터로 갔다가 낭패였어요. 고흥 터미널에서 나로호우주센터까지 하루 4번 버스가 닿는데 주말에는 버스 시간이 또 바뀌더라고요. 이런 건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해야 얻을 수 있는 고급 정보예요. 제가 실제로 경험한 여행정보를 추려서 제 홈페이지(traintrip.kr)에 올리고 있어요. 저는 지금껏 자가용을 산적이 없어요. 모든 여행을 대중교통으로 다녀요. 저처럼 뚜벅이 여행자가 더 편리하고 즐겁게 여행하도록 몸으로 얻은 여행정보를 많이 공유할 거예요.
설원을 달리는 기차 [사진 박준규]

설원을 달리는 기차 [사진 박준규]

알록달록한 줌마렐라열차의 질주 [사진 박준규]

알록달록한 줌마렐라열차의 질주 [사진 박준규]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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