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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성희의 어쩌다 꼰대(6) 밥벌이 공치사 하다 가사분담 혹만 붙인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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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퇴직한 남편보다 아내가 더 바쁘다. 약속도, 외출도 더 잦고 잦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과 아내의 인간관계 틀이 다르기 때문이다.

퇴직한 남편보다 아내가 더 바빠 #평생 밥벌이 공치사 하려다 #아내 가사노동 태업에 일만 늘어

퇴직한 남편보다 아내가 더 바쁘다. [사진 rawpixel]

퇴직한 남편보다 아내가 더 바쁘다. [사진 rawpixel]

월급쟁이 출신 남편들 인간관계는 직장, 출신학교 중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취미·동아리 등 ‘조직’을 떠난, 자발적인 모임으로 엮이는 경우는 퍽 드물다. 형편이 이러니 직장을 떠나면 사람을 만날 일이 급격히 줄어든다. 전 직장동료의 애경사, 동창 모임이야 매일, 매주 있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 대인관계가 다양한, 이른바 ‘마당발’이 아닌 바에야 시간이 지날수록 외출 횟수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아내들은 다르다. 특히 전업주부들의 경우 아파트며, 자녀들 학교며 지역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 남편의 퇴직 여부와 무관하게 ‘만남’은 그대로, 계속 이뤄진다. 당연히 퇴직 남편보다 바깥 일이 많다. ‘일식이님, 삼식이놈’이라든가 ‘곰국 끓이는 것을 보면 겁난다’는 이야기가 도는 이유다.

삼식이 되지 않기 위해 요리를 배우는 어르신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삼식이 되지 않기 위해 요리를 배우는 어르신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렇다고 퇴직자들의 인간관계가 딱하거나 삭막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의 자녀 결혼식장에서, 빈소에서 자연스레 만나 다양한 정보며, 일화를 나눈다. 밥그릇을 놓고 경쟁할 일이 없으니 현직에 있을 때보다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서먹했던 옛 동료와 뒤늦게 가까워지는 일도 생긴다.

이건 몇 년 전 귀에 들어온 퇴직자 ‘사발통문’ 중 하나다. 어떤 이가 20년 넘게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게 됐다. 명예퇴직도 아닌 데다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몹시 난처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자녀들이 늦어 학비 등 한창 돈 쓸 일이 많던 때라 더욱 그랬단다.

“어, 어”하는 사이에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게 늦어지면서 살림만 하던 그의 아내가 편의점 캐셔인가를 하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런 그 아내가 며칠 뒤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펑펑 울더란다. “당신이 그리 힘들게 돈을 벌어오는 줄 몰랐다”며. 육체적으로 힘들고, 온갖 진상에 시달리자 그간 남편이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롯데마트 캐셔 [ 롯데마트 제공 ]

롯데마트 캐셔 [ 롯데마트 제공 ]

필자 또한 퇴직자로서 남의 일 같지 않아, 역시 전업주부인 집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부부가 함께 울고 난 뒤 분발한 남편이 재취업에 성공했다는 미담을 통해 밖에서 밥벌이를 위해 어떤 애환을 겪어왔는지 헤아려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결과는, 혹만 붙였다. 집안 일이야 말로 ‘감정노동’을 포함한 ‘노동’이라 주장한 아내가 “나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만다는 뜻의 ‘남귤북지(南橘北枳)’란 말이 있다지만 이 가슴 저린 미담이 어찌, 왜 ‘가사분담 폭탄’의 도화선이 되었을까.

김성희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jaejae99@hanmail.net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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