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야당이 보이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아무리 정당들이 손가락질받고 있지만, 오늘날 정당 없이 대의민주주의를 생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시민들의 다원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정치 학습을 통해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고, 정치적 대표를 충원하는 정당의 기능은 지금까지는 대의민주주의를 이행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제도다. 하지만 정당이 존재한다고 저절로 민주정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복수의 정당들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그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고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뤄내지 못하면 민주정치는 바로 굴러갈 수 없다.

스스로 깎아먹는 야당 존재감이 #정부·여당의 과속 질주를 초래 #야당이 살아야 민주정치도 산다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 정치 상황이 그런 경우다. 청와대와 행정부가 세법개정안과 부동산 대책, 탈(脫)원전 정책, 최저임금 등 국민생활과 직결된 굵직굵직한 정책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고 있는데, 이를 꼼꼼히 따져 문제점을 지적하고 보완점을 제시해야 할 야당들의 목소리가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간헐적으로 비판 성명을 내고 있기는 하나 워낙 존재감이 미미한 탓에 여론을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이를 비웃듯 정부·여당의 과속질주는 거침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전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운동장이 기운 이유도 있지만 야당들의 미약한 존재감은 스스로 자초한 탓이 크다. 우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부터 그렇다. 엊그제 혁신선언문을 내놓고 ‘신(新)보수주의’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정작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 세력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인적 청산도 없는 상태여서 내부에서조차 “어느 방향으로의 혁신이냐”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건강한 야당이 필요하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부에 홍준표 대표가 “여당 때보다 쉽다. 야당은 할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야당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부적절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세비 축내면서 편하게 살자고 야당 하는 것인가.

제2 야당인 국민의당 역시 당대표 자리를 놓고 내홍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다. 어제 안철수 전 의원이 “당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당대표 출마 선언을 했다. 그러나 당을 위기로 몰아넣은 증언 조작 사건의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안 전 의원이 전면에 나선다고 당이 쉽게 정상궤도로 올라설지는 의문이다. 벌써 의원 12명이 반대성명을 내는 등 내분이 커져 가는 상황에서 당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이들 두 당은 대선 후 당대표를 바꾸고 분위기를 일신한 바른정당과 정의당과 달리 대선후보가 대표가 됐거나 대표선거에 출마한 경우다. 그들이 대선 때 국민 선택을 받지 못한 공약을 고집한다면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들이 가져야 할 건 대선 때의 치열함뿐이며 자기반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노선으로 야당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정부 정책의 허실을 따지고 새로운 대안을 치밀하게 고민해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다. 그래야만 정부·여당의 일방적 독주 없는 건강한 민주정치가 가능하게 된다. 야당이어서 할 일이 더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