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맥주가 배부른 술? 한국 맥주 맛 없다고? 몰라서 하는 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성공한 덕후. 수제 맥주 전문점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공동 창업자 박상재(29)씨가 딱 그렇다. 2014년 카이스트 경영대학원(MBA) 재학 시절 홈브루잉(Home brewing, 집에서 맥주 만들기)을 알게 되면서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맥주를 만들 수 있을까’만 연구했다. 학교에선 당연히 공부가 아니라 ‘맥주 덕후’로 유명했다. 당시 학교엔 교수나 학생 불문 그의 맥주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2016년 또 다른 맥주 덕후이자 국제 공인 맥주 소믈리에인 김태경(39)씨와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를 열었다.
그리고 2017년 6월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세계맥주양조대회(NHC·National Homebrew Competition)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맥주 올림픽으로 불리는 이 대회엔 30개 분야의 1만여 맥주가 출품됐다. 박씨 ‘사워에일(Sour Ale)’에서 우승했다.

덕질을 직업 삼다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공동 창업자 박상재씨가 직접 만든 맥주 장비 앞에섰다. 박종근 기자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공동 창업자 박상재씨가 직접 만든 맥주 장비 앞에섰다. 박종근 기자

덕질은 박씨 인생의 원동력이다. 무선 조종 자동차(RC카)에 빠졌을 땐 태국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출전해 세계 랭킹 40위까지 올랐다. 아예 덕질을 직업으로 삼기도 했다. 야구에 빠졌을 땐 야구용품 매장을 했고 지금은 맥주 회사에서 일한다. 좋아하는 게 생기면 해당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푹 빠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무슨 취미든 한번 빠지면 거기에만 집중한다”며 “덕질의 기본인 장비 사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덕질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남들보다 빨리 실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세계맥주대회 한국 첫 우승자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박상재의 맥주론 #카이스트 MBA 출신 #'맥덕'으로 설비도 직접 제조 #"세상에 맛없는 맥주는 없다"

숱한 덕질의 역사 중에도 맥주는 박씨가 가장 깊게 빠진 아이템이다.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 조언대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관심은 손으로 직접 뭔가 만드는 데 있었다. 수제 맥주는 직접 맥주 설비를 만들고 그 기계로 맥주를 만들어내는 이중의 제작 과정을 거치니 더욱 매력적이었다. 장비에 따라 맛이 확확 달라지는 걸 바로바로 확인하는 묘미도 있었다.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에 있는 발효조(맥주 숙성 기계)나 냉각용 기계 등 10여 개의 맥주 장비가 그의 작품이다.

입문 5개월 만에 대회 휩쓸다

6월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세계맥주양조대회 '사워에일' 분야에서 우승한 후 박상재씨가 환호하고 있다. [사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페이스북]

6월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세계맥주양조대회 '사워에일' 분야에서 우승한 후 박상재씨가 환호하고 있다. [사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페이스북]

홈브루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씨는 ‘맥주 잘 만드는 사람’으로 입소문이 났다. 2014년 5월 국내 최대의 홈브루잉 동호회인 ‘맥주만들기동호회’가 주최한 KHC(Korea Home brewing Contest)에 나가 3위로 입상하면서부터다. 불과 5개월 만이었다. 덕후 뿐 아니라 업계에서도 그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같은해 8월 서울 신사동의 수제 맥주 전문점 ‘쓰리매너티’ 대표가 맥주 제조를 제안했다. 당시엔 순전히 취미 생활이었던만큼 금전적 보상 대신 “맥주 100잔을 달라”고 말했다. 재미삼아 만든 그의 수제 맥주는 대박이 났고, 다른 수제 맥주집 뿐 아니라 양조장에서도 “도와달라”는 제안이 쏟아졌다. 그는 고객 성향에 따라 레시피를 조절했다. 예를 들어 50대 이상 남성 고객이 많은 매장엔 구수한 맛을, 20대 여성이 많은 곳엔 상큼한 맥주를 만드는 식이다.
이렇게 영역을 확장하는 틈틈이 국내 대회에서 15차례나 우승했다. 그리고 2015년 9월 김태경씨를 만났다. 국제 공인 맥주 소믈리에인 김씨는 그가 심사위원을 맡은 대회마다 우승을 휩쓰는 박씨를 눈여겨보다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2016년 4월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를 열었다. 김씨는 대표를, 박씨는 맥주 장비 설계를 맡았다.

베짱이라 돈을 번다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성수점엔 인조잔디가 깔려있는 야외 공간이 있다. [사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홈페이지]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 성수점엔 인조잔디가 깔려있는 야외 공간이 있다. [사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홈페이지]

박씨는 스스로를 '천성이 탱자탱자 노는 베짱이'라고 소개했다. MBA를 마친 후 다른 졸업생들처럼 국내외 기업에 취업하지 않은 것도 정시 출근과 빡빡한 근무 환경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박씨는 “내가 워낙 돈 쓰고 노는 걸 좋아하다보니 남들이 언제 돈 쓰는 지도 알 수 있다”며 성수동 본점 매장의 야외 공간을 예로 들었다. 인조잔디가 깔린 이곳은 고객들이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공유하면서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를 대중에 알린 일등공신이다. 그는 “대학 때 선선한 바람 부는 잔디밭에 누워 술 마시는 게 정말 좋았는데 그걸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매장에 처음 온 사람이 깜짝 놀랄 만한 게 있어야 한다는 영업 원칙을 갖고 있다. 성수 본점에 맥주 탭을 무려 100여 개나 설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웬마한 수제맥주 전문점은 기껏해야 15~20개의 탭이 있는데 이 정도로는 사람들을 놀래킬 수 없기 때문이다.

국산 맥주는 치킨과 찰떡궁합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내부. 물 100여 개의 맥주 탭이 설치돼 있다. [사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홈페이지]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내부. 물 100여 개의 맥주 탭이 설치돼 있다. [사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홈페이지]

맥주 덕후답게 맥주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바로잡는 남다른 시각을 많이 얘기했다. 그는 “맥주는 취하지 않고 배만 불러서 싫다고들 말하는데 이는 맥주를 모르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맥주 중엔 알코올 도수가 22%로 소주보다 높은 것도 있고 색깔도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하단다. 첨가물이나 발효 방법에 따라 맥주 맛은 수백, 아니 수천 가지를 넘어선다.
박씨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많이 먹어보라”고 했다. ‘맛없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대량 생산하는 국산 맥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의외로 “세상에 맛없는 맥주는 없다”고 단언했다. 오히려 “치킨이랑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맥주이자 사전 속 정의를 제대로 구현한 정답”이라며 후한 점수를 줬다. 국산 맥주는 라이트 라거(light lager)에 속하는데 바로 이 맥주의 사전적 정의가 ‘금색 빛에 풍미는 가볍고 탄산이 많아 청량하면서 쓰지 않은 맥주’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조사를 해보면 고객들은 ‘더운 여름날 갈증 해소용’이라거나 ‘치킨과 함께’‘한 잔 쭉 ’ 등을 선호해요. 기업은 고객의 선호대로 청량하고 쓰지 않은 라이트 라거를 만드는 거죠. 많은 시설과 비용을 들여 만든 맥주입니다.”

흑맥주가 인기 없는 이유

박상재씨는 "많이 놀아본 천성적 베짱이라 남들이언제 돈을 쓸 지 잘 안다"고 말했다.박종근 기자

박상재씨는 "많이 놀아본 천성적 베짱이라 남들이언제 돈을 쓸 지 잘 안다"고 말했다.박종근 기자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는 문 연 지 1년여 만에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2016년 12월 옆 건물로 매장을 넓혔고, 하남 스타필드와 서울 잠실, 인천 송도에도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박씨는 “1% 시장에서 5%로 조금 확대했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표현했다. 술과 안주를 함께 먹는 한국식 음주 문화 때문에 맥주 그 자체를 즐기는 수제 맥주가 빠른 시간 안에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깔려 있다. 흑맥주를 떠올리면 된다. 국내에선 유독 흑맥주의 인기가 떨어진다. 이는 흑맥주가 음식과 페어링하는 술이 아니라 맥주 자체를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트 라거인 기존 국산 맥주에 비해 수제 맥주는 향과 맛이 진하기에 페어링하는 음식도 고민이다. 짜고 매운 한식 특유의 자극적인 음식은 수제 맥주와는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인정받은 맥주 덕후의 다음 목표는 뭘까.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가 한국에서 인정받는 수제 맥주 회사를 넘어서 한국을 대표하는 맥주회사로 성장하는 거예요. 대량 생산 설비를 구축해 병과 캔에 담긴 수제 맥주를 생산해 마트나 편의점에서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그때문입니다.”
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