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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에 동독 탈출한 수영선수, 전 세계 유랑하는 영화배우 되다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매거진M] ‘택시운전사’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1980년 5월 광주로 향한 독일인 기자(토마스 크레취만)와 평범한 서울의 택시운전사(송강호)의 눈에 비친 광주민주화운동을 담아낸 ‘택시운전사’(8월 2일 개봉, 장훈 감독). 이 영화로 처음 한국영화에 출연한 토마스 크레취만(55)은 낯선 배우가 아니다. 혹자는 ‘피아니스트’(2002,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작전명 발키리’(2008,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인상적인 독일군 장교로, 혹자는 호러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스탕달 신드롬’(1996), 독일 로텐버그 식인사건을 다룬 ‘그림 러브 스토리’(2006, 마틴 웨이즈 감독)의 광기 어린 살인마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택시운전사’에서 실제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 역을 맡아, 광주의 참혹한 광경에 오열하던 그의 모습이 신선했던 이유다.

개봉에 맞춰 내한한 그를 7월 24일 서울에서 만났다. 소탈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돌연 자신의 카메라로 인터뷰 현장을 담기 시작했다. 삶의 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독특한 에너지가 삽시간에 모두를 장악했다.

magazine M 인터뷰 현장에서 자신을 촬영하는 포토그래프를 카메라로 포착하고 있는 토마스 크레취만 / 사진=정경애(STUDIO 706)

magazine M 인터뷰 현장에서 자신을 촬영하는 포토그래프를 카메라로 포착하고 있는 토마스 크레취만 / 사진=정경애(STUDIO 706)

―인터뷰 현장에서 포토그래퍼의 사진을 찍는 배우는 처음이다.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어떤 현장에서든 항상 카메라를 든다. 4개월 전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는데, 신기한 맛에 열심히 하다 보니 이 라이카 카메라도 선물 받게 됐다.”

―‘택시운전사’에서 광주에 간 위르겐 힌츠페터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카메라를 든다. 당신이 사진을 찍는 이유는.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1913~1954)는 ‘최고의 사진은 진실(을 포착한 것)’이라고 했다. 내 라이카를 ‘로버트 카파 카메라’라 부른다면 답이 되려나. 내가 본 진실을 사진으로 간직하는 게 좋다. 대단한 의미를 지닌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게 아니다. 힌츠페터도 마땅히 드러난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 광주에 갔을 것이다.”

―이번 영화를 하기 전 힌츠페터를 알고 있었나.
“아무것도 몰랐다. 한국에서 그렇게 거대한 유혈 진압 사태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이다. 굉장히 놀랐고,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도 잘 모르더라. 안타까웠다.”

―출연을 결심한 이유일까.
“배우에게 국가적으로 유의미한 작품에 참여하는 건 중요한 기회다. 이런 경험이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다. ‘스탈린그라드’란 제목의 영화를 두 편이나 출연했는데, 두 번째로 찍은 2013년작 ‘스탈린그라드’(표도르 본다르추크 감독)는 러시아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러시아영화였다(극중 토마스 크레취만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소련에 맞선 작전을 펼치다, 죽은 아내와 닮은 소련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독일군 대위 역을 맡았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 영화로 받은 감동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양훈’ 감독을 만나자마자 ‘택시운전사’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좋은 시나리오였다.”

'택시운전사' 촬영 현장에서 배우 송강호와 즐거운 한때.

'택시운전사' 촬영 현장에서 배우 송강호와 즐거운 한때.

―‘양훈’은 장훈(Jang, Hoon)의 독일식 발음인가?
“맞다(독일어로 J는 영어의 Y와 같이 발음한다). ‘양’은 독일어로 ‘젊다(Jung)’와 비슷한 발음이기도 하다(웃음). 현장에선 주로 ‘디렉터 훈’이라고 불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열여덟 살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나.
“생생히. 10대 때 프로 수영선수였는데,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훈련하다, 1979년 수영을 그만뒀다. 1980년부터 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1983년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독을 탈출했다. 내 인생에서도 잊을 수 없는 시기다.”

―힌츠페터가 계엄군의 삼엄한 통제에 분노하고, 군부독재의 총에 쓰러지는 군중을 카메라에 담다 오열하는 장면이 강렬했다. 어떤 심정으로 연기했나.
“‘택시운전사’ 이전에는 한국에 개인적인 유대감이 없었다. 1980년대 광주 세트장은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허구의 이야기를 다룬 여느 영화들처럼 시나리오가 원하는 감정에 최대한 충실하려 했다. 힌츠페터는 외부인으로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고, 그런 관점에서 연기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영화에서 그가 흘린 눈물은 내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

―어떤 감정인가.
“동독을 탈출할 때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를 거쳐 서독으로 갔다. 그때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이 따뜻하게 환대해준 덕분에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스탈린그라드’ 영화를 찍을 무렵 유고슬라비아는 이미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독립 민족간의 갈등과 학살을 겪고 있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힌츠페터도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의 학살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지난여름 매니저도 없이 혈혈단신 한국에 와 4개월 반 동안 제작진과 합숙하며 촬영했다고. 슬럼프는 없었나.
“촬영 기간 내내 거의 이틀에 한 번 지역을 이동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나날이 떠오른다. 언제나 무척 더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가뜩이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언어·문화적 장벽이 생각보다 높더라. 다른 배우나 스태프가 무슨 얘기 중인지, 감독이 뭘 원하는 상황인지 따라가려고 매 순간 노력하고 학습했다. 차라리 연기하는 게 가장 쉬웠을 정도다.”

'택시운전사' 내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목숨처럼 지켰던 위르겐 힌츠페터처럼 실제 토마스 크레취만도 "진실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고 했다. [사진 쇼박스]

'택시운전사' 내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목숨처럼 지켰던 위르겐 힌츠페터처럼 실제 토마스 크레취만도 "진실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고 했다. [사진 쇼박스]

―힘겨운 외부 환경이 연기에도 영향을 줬을까.
“안 줬길 바라지만….”

―한국영화 촬영 현장에서 가장 낯설었던 것은.
“한국의 영화 촬영 시스템은 내가 아는 다른 모든 나라와 가장 달랐다. 일단 촬영하면서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기분이다. 약간, 서커스투어 같달까(웃음). 반면 ‘양훈’은 내가 만나본 수많은 감독 중 가장 정밀하고 정확한 감독이었다. 이상한 조합일 수 있는데, 정말 그랬다.”

―예를 들면?
“촬영 스케줄이 열 번도 넘게 바뀌었다. 비가 안 오는 곳을 찾아다니느라, 같은 장소로 다섯 번이나 되돌아갔던 적도 있다. 할리우드라면 한 촬영지에서 날씨가 좋을 때와 궂을 때, 두 경우의 스케줄을 짜고, 촬영 분량을 마친 뒤 다음 촬영지로 이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어떤 장소에 도착하면 그 순간부터 현장은 디렉터 훈이 원하는 대로 계획적으로 돌아갔다. 미묘한 밸런스가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현장에 찾아왔을 때 눈물을 보였다고.
“내가 매사에 감정적인 편이다. 박찬욱 감독이 왔을 때는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피아니스트’를 함께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대해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쳤던 것 같다.”

―‘피아니스트’는 독일과 폴란드에서 촬영했다. 최근엔 ‘원티드’(2008,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작전명 발키리’‘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조스 웨던 감독)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작업했다. 유난히 다국적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동독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후 세계 탐험이 평생의 꿈이 됐다. 데뷔 초 출연한 ‘스탈린그라드:최후의 전투’(1993, 조셉 빌스마이어 감독)는 독일에서 크게 주목받은 대작이었지만, 그 작품을 끝내자마자 독일을 떠났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2~3년씩 살며 연기활동을 했다. 그러다 할리우드까지 갔다. 나는 독일이 아니라, 세계의 시민을 자처한다. 언제나 ‘투어’ 중인 셈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촬영하며 친구를 사귀고, 관광객이 절대 발견하지 못하는 곳을 누구보다 먼저 가볼 수 있다는 건 배우라는 직업의 축복 중 하나다.”

'택시운전사' 스틸컷

'택시운전사' 스틸컷

―지금까지 독일군 역할을 열 작품 이상 했다. 역사의 과오를 드러내고,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많았다. 계속해서 연기해온 동력도 그런 주제의식과 관련이 있을까.
“내 아이들이 맞을 미래에 관해 매우 비관적이다. 휴머니티는 폭력으로 대체되고 있다. 난 동물애호가인데, 우리 인간이 이 행성의 다른 생물에게 그렇게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좋아서 연기를 한다. 매 작품 더 잘하고 싶으니까.”

―차기작이 줄줄이 기다린다.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파라마운트가 제작하는 미국 TV 첩보 시리즈 ‘베를린 스테이션’(EPIX) 촬영을 마쳤다. 지금 캐나다 벤쿠버에서 찍고 있는 건 ‘드래그 어크로스 콘크리트’라고, 멜 깁슨 주연 범죄 액션이다. 웨스턴 호러영화 ‘본 토마호크’(2015)를 연출한 S 크레이그 찰러 감독 신작이다. 애드벌룬이 동원된 1970년대 동독 최대 탈출 스토리를 담은 영화도 출연할 예정이다.”

―한국영화에서도 또 볼 수 있을까.
“정말 그러고 싶다. 박찬욱 감독한테도 어필했다. 그런데 한국영화에 나를 필요로 하는 캐릭터가 얼마나 될지 몰라서 아쉽다. 한국 배우들도 언어적인 장벽 때문에 다른 나라 영화 출연에 한계가 있잖나. 한국영화에 대해선 나 역시 같은 입장이다.”

―한국에서 나흘간 ‘택시운전사’ 홍보 일정을 마치자마자 밴쿠버에서 촬영이 있다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당신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내 친구와 가족이 있는 곳. 지금은 베를린과 미국 LA지만, 그들이 다른 어디론가 간다면 그곳이 내 집이고, 고향이다.”


토마스 크레취만의 인스타그램(@thomas_kretschmann_)에는 그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삶의 진심어린 순간들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동료 배우들의 매혹적인 맨얼굴도 그 중 하나. 장담컨대, 빠져들게 될 것이다.

벤 킹슬리

벤 킹슬리

잭 블랙

잭 블랙

틸다 스윈튼

틸다 스윈튼

송강호

송강호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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