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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당신] 치료제 없어서, 있어도 비싸서 … 이중으로 고통받는 희귀암 환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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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15년 6월 서울대병원에 33세 여성 이모씨가 호흡곤란으로 실려 왔다. 검사 결과 이름도 생소한 ‘NUT 정중선암’ 4기였다. 종양이 가슴(흉곽)까지 퍼진 상태였다. 정중선암은 피부의 상피세포(몸 표면을 덮고 있는 세포)에 암이 생기는 것으로, 몸의 중앙에 있는 머리·목과 흉곽에 암세포가 침범해 발생한다.

환자 드물어 신약 개발도 잘 안 돼 #어렵게 약 구해도 건보 적용 못 받아 #실낱 희망 임상시험 기회는 별따기 #희귀암 센터 지정해 치료 도와야

요즘 유방암·위암 등 주요 암은 5년 이상 생존도 흔하다. 하지만 정중선암의 평균 생존율은 암이 다른 장기로 퍼지지 않았을 땐 6개월, 이미 퍼진 상태면 4개월에 불과하다. 암세포만 공격하는 표적항암제가 아직 없어 치료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다.

이씨를 담당한 김태민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논문에 보고된 환자가 100명도 되지 않을 만큼 희귀한 암”이라며 “문헌과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치료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환자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아이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갖고 싶어 했다. 김 교수는 “퇴원 후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진단받은 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침샘암 환자인 백영묵씨가 집에서 컴퓨터로 치료약을 검색하고 있다. 백씨는 “전이된 침샘암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어 혼자 찾아보고 있다. 창문 하나 없는 캄캄한 독방에 갇혀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

침샘암 환자인 백영묵씨가 집에서 컴퓨터로 치료약을 검색하고 있다. 백씨는 “전이된 침샘암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어 혼자 찾아보고 있다. 창문 하나 없는 캄캄한 독방에 갇혀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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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인구 10만 명당 5명 이하로 환자가 발생하면 희귀암으로 본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소수’인 희귀암 환자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먼저 이씨 같은 정중선암 환자처럼 발생 자체가 드물어 시장이 크지 않다 보니 제약회사에서도 치료제 개발에 관심이 적다. 또 임상 연구가 많지 않아 신약이 개발되는 속도도 느리다. 윤탁 국립암센터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예컨대 뼈에 생기는 골육종암은 신약 개발이 전무하다. 1980년대에 쓰던 약으로 항암치료를 한다”고 말했다. 중앙암등록본부 통계(2014년)에 따르면 골육종암은 연간 발생 환자 수가 180명에 불과하다.

다행히 써볼 만한 약이 있어도 문제는 있다. 관련 연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약을 쓰는 데 제약이 많고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영묵(51·경기도 성남시)씨는 2015년 3월 침샘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았지만 1년 뒤 암이 간과 췌장으로 퍼졌다. 병원에서는 “전이된 침샘암에 쓸 약이 없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희망이 생겼다. 세포 조직검사를 했더니 위암·유방암에 쓰이는 표적항암제(허셉틴)에 반응하는 유전자를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이 표적항암제를 곧바로 쓰지 못했다. 윤탁 교수는 “침샘암은 희귀암이라 대규모 임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연구 논문에 나온 치료 데이터를 근거로 약을 쓰게 된다. 특정 유전자가 있을 때 침샘암 환자에게도 허셉틴을 쓰면 효과가 있다는 자료가 있지만 국내에선 이를 바탕으로 약을 쓰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건보 안 돼 한 달 약값 2000만원 넘기도

해외와 달리 국내에서만 희귀암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치료약에 대해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악성흑색종이 대표적이다. 서울대병원 김태민 교수는 “국내에선 환자 수가 적어 목소리가 작다 보니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가 부담하는 약값이 비싸 효과 좋은 최신약을 쓰고 싶은 환자는 임상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악성흑색종 4기 환자인 김모(37·여·부산)씨의 한 달 약값은 2000만원이 넘는다. 남편 백모(36)씨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약값을 부담하기 힘들어 임상시험을 신청했는데 탈락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다음 임상에 들어가길 기다리면서 독성이 강한 1차 항암제를 썼다. 그러다 뼈에 전이된 암이 척수를 압박했고, 하반신 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이 때문에 임상시험을 포기하고 당장 치료제를 써야 했다.

악성흑색종의 표준 치료법은 두 가지 약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백씨는 약을 수소문하던 중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라는 곳을 알게 됐다. 국내에 공급되지 않는 희귀약을 신청하면 수입을 대행해 주는 국가기관이다. 백씨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매일 전화를 넣어 2주 만에 약을 받았다”며 “두 가지 약값으로 한 달에 2000만원 이상 나간다”고 말했다.

이처럼 희귀암 환자들의 이중고가 이어지는 이유는 뭘까. 문헌에 나온 사례만으로는 근거가 약하다는 이유로 치료 허가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식 승인되지 않은 약은 ‘임의 비급여’(환자 본인부담 100%)에 묶여 있어 의사 입장에선 처방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자칫 과잉 처방으로 벌금을 낼 수 있다. 침샘암 환자 백영묵씨는 “한 대학병원에선 이 약을 쓰려면 제3국에 가서 시민권을 받은 뒤 돌아와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래야 한국법에 저촉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같은 약을 쓰는 위암·유방암 환자는 약값의 5%만 내면 되지만 침샘암 환자는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백영묵씨는 국립암센터에서 3주간 약값 220만원을 내고 허셉틴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윤탁 교수는 “허셉틴은 유방암에 쓰인 지 10년이 넘었고, 2010년에는 위암 치료에 건강보험이 적용될 만큼 널리 쓰인다. 그러나 정작 치료제 선택권이 좁은 희귀암 환자는 적용 사례에서 제외돼 쉽게 쓰지 못한다”고 말했다.

희귀암 환자 신약 사용 땐 규제 완화를

국내에선 지난달 1일부터 흑색종 환자 치료제 ‘젤보라프’에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2011년 8월 흑색종 환자 치료제로 이 약을 허가한 지 6년 만이다. 하지만 제한이 있다. 첫 번째 치료약으로 쓸 때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김씨처럼 이전에 다른 항암제를 먼저 쓴 환자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김씨의 남편은 “건강보험이 적용될 줄 알고 지난달부터 약을 썼는데 당황스럽다. 그간 모아둔 5000만원을 다 썼는데 앞으로 들어갈 약값이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여론 형성이 안 되고 희귀하다는 이유로 배제당하는 게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김태민 교수는 “전이성 흑색종 환자는 매년 150여 명이 발병하는데 이 중 임상시험에 들어갈 수 있는 환자는 3분의 1이 채 안 된다. 환자가 임상시험을 기다리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희귀암도 다 같은 희귀암이 아니다. 통계가 잡히지 않을 만큼 환자 수가 적은 암도 있지만 해마다 1000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연부조직 육종암, 500~600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침샘암·흑색종 등도 있다. 그런데 10대 암에 들어가는 비호지킨 림프종 환자 수는 연간 5000명이다. 채 5배가 되지 않는 환자 수 차이 때문에 치료에 여러 제약을 받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치료약을 써볼 수 있는 희귀암부터 관심을 갖고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태민 교수는 “희귀암 환자에게 새로운 약을 사용할 땐 경제성 평가나 규제를 완화해 줘야 한다. 희귀암 센터를 지정해 통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윤탁 교수는 “환자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단일 기관이 아닌 전국 차원에서 임상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임상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환암·안종양·심장암 … 연 2500명 이하 발병 희귀암

희귀암은 대략 인구 10만 명당 5명 이하로 발생하는 암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연간 약 2500명 이하로 발병하는 암이 희귀암 범주에 들어간다. 2016년 발표된 중앙암등록본부 자료에 따르면 암 발생 건수는 21만7057건(2014년 기준)이었다. 이 중 2500건 넘게 발병한 암 15개가 전체 암의 87%를 차지했다. 나머지 암에는 혀에 생기는 설암(681건), 남성 생식기에 생기는 고환암(259건), 항문암(253건), 안구에 생기는 안종양(100건), 석면 노출이 주원인인 흉막암(23건), 심장암(10건) 등 희귀암이 들어 있다. 암이 처음 생긴 부위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어 진단명을 못 붙이는 ‘원발부위불명 암’도 1754건이나 된다. 

이민영 기자 lee.m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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