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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속의 한반도, “외세 의존은 나라를 망친다!”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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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명동을 떠난 직후 청일 전쟁이 시작됐다. 조선에 대한 일제 침략이 본격화하고,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몰락이 가속화하는 사건이었다.

전쟁은 그해 7월25일 청나라 함대가 기항한 아산만 근해에서 시작됐다.

아산만은 조선에서 유일한 청나라 군대의 유일한 보급항이었다. 이를 막으면 조선 주둔 청나라 군대는 해상 보급이 막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 군함들이 이 바다에 있던 청나라 군함들을 공격한 풍도 해전이 전란의 시초였다.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 몰락 가속화 #日 여순대학살 사건으로 中 2만 명 몰살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명동은 일본 차지 #中·日 내부 정치는 한반도에 막대한 영향 끼쳐

풍도 해전에는 일본 해군에서 나중에 '해군의 신'으로 받들게 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년)도 배수량 3709t의 방호순양함 나니와(浪速)함의 함장으로 참전했다. 도고는 해 청나라 병력 1200명을 수송 중이던 영국 선적 증기선 고승(高陞)호를 격침시켰다. 나나와함은 기계실이 포탄에 의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갑판에 장갑을 두른 방호순양함으로 영국에서 건조된 증기선이다. 도고는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에서 '해군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는 일본군 [사진 중앙포토]

압록강을 건너는 일본군 [사진 중앙포토]

청일전쟁의 모든 전투는 청나라 군대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은 청나라, 즉 중국 세력이 동아시아에서 몰락하는 신호탄이었다. 1894년 7월 28일 지상에서 성환 전투가 벌어져 청나라 군대가 다시 대패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오시마는 약 4000명으로 이뤄진 여단을 이끌고 청나라의 보급기지가 있는 아산만으로 이동했다. 그는 지금의 천안시 성환읍에서 3500명에 이르는 청나라 육군을 만나 궤멸시켰다.

청일전쟁 당시 공개리에 청군을 참수하는 일본군의 잔혹한 모습. 전쟁 직후에는 백동화 인플레이션 때문에 온 나라가 신음했다. [사진 중앙포토]

청일전쟁 당시 공개리에 청군을 참수하는 일본군의 잔혹한 모습. 전쟁 직후에는 백동화 인플레이션 때문에 온 나라가 신음했다. [사진 중앙포토]

이 전투가 끝난 며칠 뒤인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전쟁을 공식 선포했다. 이후 9월15일 평양전투로 청나라 육군은 조선을 떠나야 했다. 9월 17일 압록강 하구에서 청나라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에 궤멸된 황해해전으로 청나라는 서해에서 제해권을 잃었다.

10월24일엔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침공했으며 이후 1894년 12월10일 일본군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시민 2만 명을 학살한 여순대학살 사건을 벌였다.

여순대학살 (뤼순대학살, 旅順大屠殺) [사진 바이두 백과]

여순대학살 (뤼순대학살, 旅順大屠殺) [사진 바이두 백과]

전쟁은 1895년 4월17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끝났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의 독립국 인정’으로 시작해 ‘대만, 펑후제도, 랴오둥 반도의 일본 할양’ ‘2억량(당시 청나라의 3년치, 일본의 4년반치 예산에 해당)의 배상금 지급’ ‘청나라 항구의 개항과 양쯔강 자유통행권 인정) 등으로 이뤄졌다.

시모노세키는 이토의 고향인 조슈(長州) 지역으로 현재 야마구치 현에 속해 있다. 조슈는 사쓰마(薩摩, 현재 가고시마 현)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이끌고 나중에 군벌의 바탕이 된 지역이다. 도고 제독이 사쓰마 출신이다.

이홍장은 군함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와서 조약에 서명했다. 이토를 톈진에 불러 텐진조약에 서명하게 했을 때와 반대의 상황을 연출한 셈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북양군 세력이 메이지유신 세력에 눌린 형국이다. 위안스카이가 큰소리를 치던 명동의 주둔지는 일본군이 점령했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던곳(좌), 이홍장(우) [사진 중앙포토]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던곳(좌), 이홍장(우) [사진 중앙포토]

그러는 와중에 조선은 하나씩 무너져 갔다. 동학혁명은 1894년 11월 20일~12월 10일 지금의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일본군의 화력지원을 받은 관군에게 패배하면서 막을 내렸다. 12월에는 동학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돼 처형됐다.

이렇게 조선을 장악한 일본은 1895년 10월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일본 낭인들에게 저지른 희대의 참극이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9일까지 세자를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서 지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으며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잃은 1910년 8월 29일까지 계속됐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포를 동원해 고종의 알현을 강요하는 일본군. [사진 중앙포토]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포를 동원해 고종의 알현을 강요하는 일본군. [사진 중앙포토]

1894년 위안스카이가 명동의 저택을 떠나 귀국한 사건은 1894~1895년 청일전쟁,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신호탄 성격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내부 정치는 예로부터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위안스카이는 국가와 권력층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이웃나라와 그 권력층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을 위안스카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왔던 위안스카이는 1884년 갑신정변 진압으로 조선 정국을 호령하고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는 외국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가 청나라로 돌아간 것은 이 땅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영영 떠났다는 의미다.

명동 중국대사관 터에서 살던 청나라 사람 위안스카이는 귀국해서도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조선에서 숱한 희비극을 남겼지만 귀국한 뒤에는 중국과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희대의 비극을 양산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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