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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충북의 동막골…300년 동안 닥나무 한지 만든 벌랏마을 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벌랏마을은 300년 전부터 마을 주변에 자라는 닥나무를 베어 한지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줄도 몰랐을 정도로 산속에 둘러싸인 오지 마을이다. [사진 벌랏마을]

벌랏마을은 300년 전부터 마을 주변에 자라는 닥나무를 베어 한지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줄도 몰랐을 정도로 산속에 둘러싸인 오지 마을이다. [사진 벌랏마을]

지난 21일 오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염티삼거리. 굽이굽이 7.2㎞ 고갯길을 따라 한참을 더 달리자 산 능선 아래 외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줄도 몰랐다는 ‘충북의 동막골’ 소전리 벌랏마을이다. 동막골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산골 마을을 말한다.

21가구 32명 사는 오지마을, 한지 재료 닥나무 지천에 널려 #전통 방식 한지 지장(紙匠) 3명 마을에 살며 비법 전수 #1970년 초까지 농한기에 한지 만들어 대전·청주에 팔아 #전통방식 맥 끊겼다 90년대 후반 다시 제작…체험관 건립 #한지 관심 멀어져 체험객은 감소, 마을 주민들 "전통 계승할 것"

벌랏마을엔 21가구 32명의 주민이 산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오지 마을이다. 마을버스가 하루 일곱 번 오간다. 1981년 대전시와 옛 청원군 사이에 대청댐이 생기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벌랏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야 대전으로 갈 수 있었다.

벌랏마을에 한지만들기 체험을 온 학생들 앞에서 김필수 이장이 외발뜨기로 한지를 뜨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 벌랏마을]

벌랏마을에 한지만들기 체험을 온 학생들 앞에서 김필수 이장이 외발뜨기로 한지를 뜨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 벌랏마을]

벌랏마을 사람들은 전통방식의 한지(韓紙) 제작 기술을 갖고 있다. 300년 전부터 한지를 만들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은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지천에 널렸다. 1970년대 초까지 주민들은 가을걷이가 끝날 때쯤 새순이 자란 1년생 닥나무만 베어 집집마다 쌓았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낸 뒤 이를 삶고, 방망이로 수차례 두드려 섬유질을 부드럽게 한다. 이후 물에 씻은 닥나무 껍질에 닥풀을 섞은 반죽을 대나무발에 고르게 펴 한지를 만들었다.

벌랏마을 한제제작체험관에 전시된 닥나무 껍질. 최종권 기자

벌랏마을 한제제작체험관에 전시된 닥나무 껍질. 최종권 기자

물에 희석된 반죽을 대나무발로 이리 저리 흔들어서 한지를 뜨는 이른바 외발뜨기 방식으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벌랏마을에는 이 기술을 가진 지장(紙匠·종이 뜨는 사람)이 3명 있다.

이정룡(77)씨는 “어릴 적 어른들에게 혼나가면서 외발뜨기로 한지를 뜨는 방법을 배웠다”며 “마을에 한지제작 공장이 2동이나 있었고, 닥나무를 모아 한지를 생산하는 집과 밖에 내다파는 집을 구분해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컸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든 한지는 이듬해 봄 주민들이 봇짐을 메고 대전·청주 시내에 직접 팔았다고 한다.

김필수 벌랏마을 이장이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최종권 기자

김필수 벌랏마을 이장이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최종권 기자

‘밭이 있는 장소’란 뜻을 가진 벌랏마을은 45년 전만 해도 70가구 4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다. 산기슭에 밭을 일궈 보리 등 농작물을 심고, 과일과 산나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를 했다. 겨울에는 온 동네가 한지공장으로 변했다.

김필수(65) 벌랏마을 이장은 “과거 한지를 팔아 농외 소득이 많았기 때문에 주변 마을보다 훨씬 잘 살았다”며 “한지 수요가 줄고, 산업화 바람에 젊은이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면서 한지 제작은 한동안 명맥이 끊겼었다”고 말했다.

벌랏마을 경로당 앞에 있는 정자 아래에는 300년간 이곳 주민들이 식수로 써온 샘이 있다. 최종권 기자

벌랏마을 경로당 앞에 있는 정자 아래에는 300년간 이곳 주민들이 식수로 써온 샘이 있다. 최종권 기자

인구가 줄면서 활력을 잃었던 이 마을은 90년대 후반 이 마을에 정착한 공예가 이종국(55)씨의 도움으로 한지 생산을 다시 시작했다. 2005년 농촌진흥청 등에서 지원받은 1억3000여 만원으로 가동이 중단된 옛 종이공장 자리에 한지제작 체험관을 지었다.

한지를 테마로 전통한지 체험과 별보기, 생태, 나무곤충 만들기, 천연염색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지를 생산했던 마을의 역사성을 부각해 외부에는 ‘벌랏한지마을’로 홍보했다.

벌랏마을에서 체험을 온 학생들이 떡 만들기를 하고 있다. [사진 벌랏한지마을]

벌랏마을에서 체험을 온 학생들이 떡 만들기를 하고 있다. [사진 벌랏한지마을]

이곳에서는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살펴보고 발을 이용해 한지를 뜨는 과정, 전통 한지를 활용해 부채 등을 만드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하루 묵을 수 있는 민박집은 3곳이 있다. 한지체험을 하려면 미리 예약해야 한다.

벌랏마을은 2010년 농진청이 선정한 ‘전국의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 100선’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가 공모한 신재생에너지 융·복합 지원사업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집집마다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해 전기요금 부담을 덜고 있다.

옛 마을 어귀에 가면 돌을 쌓아만든 서낭당과 벌랏나루터가 있다. 마을 경로당 앞에는 30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커다란 샘을 볼 수 있다.

벌랏마을 공방에 있는 한지 공예품. 한지제작체험관은 체험객이 올 때만 문을 연다. 최종권 기자

벌랏마을 공방에 있는 한지 공예품. 한지제작체험관은 체험객이 올 때만 문을 연다. 최종권 기자

한때 1만명이 넘었던 벌랏마을 체험객 수는 최근 3년 연간 1500여 명으로 줄었다. 김 이장은 “마을이 찾아오기 어려운데다 한지에 대한 관심도 점점 멀어져 방문객이 줄고 있다”며 “어렵긴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옛 방식의 한지 제작 기술을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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