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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 도정한 메밀의 슴슴한 맛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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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28면

▶능라도 분당점주소: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산운로32번길 12(운중동 883-3)전화번호: 031-781-3989영업시간: 매일 오전 11시30분~오후 9시(명절 당일 휴무)주차: 가능

▶능라도 분당점주소: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산운로32번길 12(운중동 883-3)전화번호: 031-781-3989영업시간: 매일 오전 11시30분~오후 9시(명절 당일 휴무)주차: 가능

“집에서 105㎜ 탄피로 냉면 면발을 뽑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혜란의 그 동네 이 맛집 #<4> 능라도 분당점

“그때는 전쟁 나고 탄피가 흔했을 때니까. 탄알이 날아가면 탄피 한쪽만 뻥 뚫리잖아. 막힌 쪽에 못과 망치로 구멍을 송송 내서 메밀 반죽을 들이붓고 꾹꾹 눌러주면 구멍으로 반죽이 빠져나와 면발이 됐다고. 가족 친지가 모이면 그렇게 국수(냉면)를 뽑아서 말아먹었어. 지금 우리 가게(1층 주방)에 있는 제분기 분창이 딱 그 탄피 크기지.”

지척에 고급 단독주택이 즐비한 성남 서판교 운중동 한켠. 모던한 벽돌 마감재의 3층 건물은 한쪽을 살짝 접은 듯 각도를 뒤틀어 멋을 부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노출 콘크리트 벽에 펜던트 조명이 은은한 반사광을 비추었다. 지하까지 총 270석의 냉면집 ‘능라도’다. 입구 간판에 큼직하게 ‘평양냉면·불고기’라고 적혀있지 않으면 갤러리라고 해도 믿을 법한 공간에서, 전쟁이니 탄피니 하는 단어는 낯설게 들렸다.

평뽕(마약 같은 중독성에 빗댄 표현)·평냉부심(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자부심)·면스플레인(냉면 먹는 법을 시시콜콜 훈계하는 것)…. 오히려 더 어울리는 건 이런 말이다. 이런 신조어를 되뇌며 ‘평냉투어’를 다니는 이들에게 이북식 냉면의 남하(南下) 역사는 임진왜란 때 도루묵 스토리처럼 고루하다. 이들을 사로잡는 건 오직 슴슴하고 간간하고, 그러나 섬세하고 은은한 맛. 노포(老鋪)의 계보는 그 맛을 증언하는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이들은 스테이크의 시어링(센불에 겉을 바짝 익힘) 정도를 따지듯 육향의 진함과 면발의 메밀 비율을 논하며 취향을 과시한다.

김영철(59) 사장이 인천에서 환경 정화사업을 하다가 2011년 제2창업으로 냉면집을 선택한 이유도 매한가지다. “맛있으니까. 평양냉면 맛을 알면 이만한 게 없다는 걸 잘 아니까.”

‘능라도’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양의 능라도에서 따왔다.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 출신 엘리트였던 부친은 월남해서 미군 부대 통역병으로 일했다. 냉면은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모일 때 함께 먹는 잔치국수 같은 것이었다. 제대로 된 제분기가 없던 시절, 황학동 시장에서 구한 탄피를 활용해 면을 뽑았던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워낙 냉면을 좋아하셔서, 작고하고 남긴 사진 중에 냉면 뽑는 과정을 찍어놓은 게 있더라구. 뒷면에 육수 배합 설명도 있고 말이야. 그걸 토대로 전국의 내로라하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연구했지. 쓰레기통을 뒤지면 어떤 재료를 어떻게 쓰나 대충 알 수 있거든.”

여인의 쪽머리처럼 곱게 똬리를 튼 면발이 투명한 육수에 절반쯤 잠겨있다. 편육과 계란 고명을 족두리처럼 올렸다. 평냉 마니아라면 듬성듬성 곁들인 무와 오이의 담음새만 보고도 어느 집 것인지 알아맞힐 것이다. “우리 집 특징이 이 방짜유기야. 냉면그릇부터 불고기불판, 소스 종지까지 모두 이걸로 써. 고기에 포함된 단백질 맛이 쉬 변하지 않게끔 유지시켜 주는 데 방짜만한 게 없거든. 최고급 음식이니까 최고급 그릇에 담아야지.”

서울 마장동에서 직접 떼오는 투뿔(++) 한우와 돼지고기로 육수를 낸다. 간장은 안 쓰고 천일염으로만 간을 낸다. 고기 찍어먹는 용도로 내는 새우젓도 전국 최고(전남 신안 생산)라고 자부한다. 그래서 다른 밑반찬은 리필을 해줘도 새우젓은 안 해준단다.

메밀과 전분 비율은 평균 80%. “메밀이 온도와 습기에 약해서 여름에 메밀 비율이 높으면 국수가 툭툭 끊어져버려. 그래도 최소 75%를 유지하고 겨울엔 92%까지 높이지. 일기예보를 보고 그날그날 1~2%씩 조절해.”

매일 대응이 가능한 건 식당에 도정기와 제분기를 갖췄기 때문이다. 쌀도 갓 도정한 게 맛있듯 메밀도 하루 전에 도정하고 제분해야 최고 맛을 낸다. 손님이 많은 여름엔 매일 200kg 정도 제분한다. 하루 1000그릇 분량이다.

판교에 가게를 낸 것은 골프선수를 꿈꿨던 아들 때문이다. 용인 연습장과 가까운 곳을 물색하다보니 이곳으로 이사오게 됐다. “강남과 가까워서 입맛 까다로운 손님들 수요가 있겠다 싶어” 선견지명으로 사둔 100평 땅이 바탕이 됐다. 2011년 ‘능라’라는 이름으로 열었다가 상표권 분쟁에 휩쓸려 능라도로 바꿨다. 현재의 건물을 올린 건 2년 전이다. 아들은 요즘 주방에서 후계 수업을 받고 있다. 인근에 사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재계 인사들 외에 박인비·배상문 등 스포츠스타들도 자주 온단다.

2015년 11월 오픈한 능라도 강남점(서울 강남구 언주로107길 7)은 서울고 동창이 운영한다. 김 사장은 요즘도 거의 매일 강남점을 드나들며 음식 맛을 체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래옥’ 강남점부터 논현동 ‘진미평양냉면’과 청담동 ‘피양옥’까지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일대에 포진했기 때문이다. 전쟁통에 평양에서 내려온 냉면이 지금 한강 이남에서 뜨거운 전쟁 중이다. ●

글·사진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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