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지 말자’ 모토, 좌충우돌 감독 벌써 차기작 시동

중앙선데이

입력 2017.07.23 00:02

업데이트 2017.07.2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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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호 08면

[정재숙의 공간탐색] 영화감독 이준익의 작업실
그림 안충기 기자-화가

그림 안충기 기자-화가

창작의 산실은 내밀한 처소다. 한국 문화계 최전선에서 뛰는 이들이 어떤 공간에서 작업하는지 엿보는 일은 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듯 유쾌했다. 창조의 순간을 존중하고 그 생산 현장을 깊게 드러내려 사진기 대신 펜을 들었다. 화가인 안충기 기자는 짧은 시간 재빠른 스케치로 작가들의 아지트 풍경을 압축했다.

과거와 화해 다룬 영화 ‘변산’
갑자기 마음이 동했어요

아나키스트 영화 ‘박열’은
권력에 맞서 개인 존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 표한 것

이 연재물의 여덟 번째 주인공은 영화감독 이준익(58)이다.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시대극 연출의 귀재다. 그는 실화 영화를 “민족과 국가와 정치 상황을 떠나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찍었다”고 했다.

평범한 사무실 한 귀퉁이에 플라스틱판 책상을 놓고 영화 한 편을 만들 때마다 바뀌는 수십 명의 제작진과 만나고 헤어지는 이준익 감독은 이를 빗대 ‘영락없는 떴다방’이라 했다. 안충기 기자-화가

평범한 사무실 한 귀퉁이에 플라스틱판 책상을 놓고 영화 한 편을 만들 때마다 바뀌는 수십 명의 제작진과 만나고 헤어지는 이준익 감독은 이를 빗대 ‘영락없는 떴다방’이라 했다. 안충기 기자-화가

307이란 숫자 외엔 아무 표식도 없는 썰렁한 사무실. ‘영화의 거리’ 충무로 한복판에 있는 건물엔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영화 <변산> 프로필 접수 중, 문 열고 들어오세요~!!’란 흰색 종이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서류 봉투를 든 건장한 청년 서너 명이 기웃거리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쭈뼛거리며 인사를 한다. 230만 명이 든 화제작 ‘박열’이 아직 극장에 걸려 있고, 흑백 저예산 영화 ‘동주’는 일본 개봉을 앞뒀다는데 이준익 감독은 벌써 다음 작품 제작에 시동을 걸었다.

“9월 11일 촬영 시작합니다. ‘변산’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고향 변산에 내려가게 된 힙합 래퍼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 역을 맡았던 박정민이 주연이고요. 몇 년 된 외부 시나리오인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동했어요.”

이 감독은 ‘즉흥적으로, 그냥 하는 거죠’라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손은 잠시도 쉴 줄을 몰랐다. 뭔가를 붙잡고 만지고 돌렸다. 뇌를 꼬고 비트는 듯 보였다. 10년 전 그와 했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자신의 묘비에 ‘열심히 도망쳤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네’로 새겨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태블릿 하나와 제작 일정표가 세워져 있는 그의 널찍한 플라스틱판 너머로 삼면 벽마다 대여섯 명 스태프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삼복더위를 잊고 있었다. 그는 “이쪽은 연출부, 저쪽은 제작부, 문간은 미술팀”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떴다방이에요, 떴다방. 영화 하나 만들 때마다 필요한 인력이 모였다가 제작 끝나면 사라지죠. 저만 여기 이 자리에 남아 있고 담당자들, 사람만 갈면 돼요. 사실 영화는 저 친구들이 다 만드는 거죠.”

그는 지인들이 붙여준 ‘스펀지’란 별명에 걸맞게 영화 제작에 관한 한 현장 사람들 말을 잘 듣는다. 특히 젊은 조력자들에게 귀를 열어 놓고 어떤 조언도 경청한다. 특히 청년기의 패기와 혈기를 사랑하기에 그들의 열정 어린 의견을 존중한다. 영화는 그 돌아가는 구조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협동 작업은 필수이고, 감독은 지향점을 제시하며 과정을 즐긴다는 것이다.

“영화 ‘박열’은 아나키스트에 대한 내 경의를 표한 것이지요. 나는 아나키스트를 영어로 인디비주얼 고잉(individual going)이라 풉니다. 권력이 주는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를 저는 아나키스트로 부릅니다. 수평의 의지랄까. 모든 예술가는 아나키스트지요.”

이 감독은 “지금 이 시점에서 1920년대 도쿄를 불러내다니, 난 박열만큼이나 시대착오적 인간”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제로부터 대역죄를 선고받은 일본인이 두 명, 한국인이 박열과 이봉창 두 사람이었는데 “일본은 저런 영화를 못 만들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박헌영·윤이상·장준하 같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분단 상황이 안타깝고 시대 현실이 아직 멀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님 웨일스 작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도 매력적이지만 중국 당국이 촬영을 허가하겠느냐고 되물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그 세계사적 저항운동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지만 역시 마음에만 묻어두고 있다고 했다.

그가 담배를 집어 들기에 왜 아직도 못 끊었느냐 물었더니 “죽으면 어차피 끊을 건데”라며 “다른 떴다방을 보러 가자”고 앞장섰다. 이 감독은 5년 전부터 이 빌딩의 3~4층에 4개의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 편집실, 작가 방, 다음 제작할 영화의 시나리오 제작소였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뛰다시피 쫓아갔더니 벌써 돌아서며 “시간을 누려야지 끌려가서야 되겠수” 한마디했다.

“돌아보면 좌충우돌했지만 맥락은 한 줄로 꿸 수 있죠. ‘황산벌’은 전복적 사고를 바탕으로 지역감정의 뿌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하다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갔죠. ‘왕의 남자’는 권력을 조롱하는 해학으로 혁명적이고, ‘라디오 스타’는 유목민적 삶에 대한 향수였어요. ‘즐거운 인생’에 와서는 내 내면을 그냥 까 보였고, ‘님은 먼 곳에’는 자연주의랄까. 일상이 전쟁 상황이 돼 버린 오늘 우리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었어요.”

그는 “‘철들지 말자’를 내걸고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했다. 아나키스트 이준익 감독의 참 ‘거시기한 인생’을 응원한다.

애마는 15년 된 스쿠터

이준익 감독의 애마(愛馬)는 스쿠터다. 어디로 튈지 몰라 ‘럭비공’이라 불리는 그답게 자동차 대신 언제 어디서나 질주 가능한 오토바이를 준마(駿馬)로 부린다. 촬영팀과 단체로 움직일 때를 빼고는 서울 홍은동 꼭대기 마을버스 종점 집부터 사무실이 있는 충무로까지, 15년째 스쿠터를 애용하고 있다. 시내는 배기량 125cc, 외곽은 800cc 모터사이클로 달린다.

“몸이 고달프면 일이 잘 풀리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는지라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려요. 시간과 경제 절약에 위험하기까지 하니, 일석삼조 아니겠어요. 교통체증으로 빵빵거리는 도심에서 바람 맞으며 달리는 기분, 삼삼하죠.”

위험하다는 말에 걸맞게 그는 어깨 한 번 빠지고 무릎 서너 번 나가는 부상을 당했지만 지금도 달리는 상상만으로 찌릿찌릿해진다는 ‘속도 마니아’다. 그를 감독으로 다시 세운 ‘황산벌’을 제작한 2003년부터 스쿠터를 탔는데 그 뒤로 거의 해마다 연속 히트 행진을 이어 갔으니 ‘행운의 스쿠터’라 할 만하다. 나이 육십을 눈앞에 둔 남자가 똥배는커녕 주름살도 찾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이 스쿠터 덕 아닐까. 티셔츠에 청바지, 샌들로 여름을 나는 그는 “따로 사치할 시간도 없어서”라며 스쿠터를 타고 휭하니 떠났다.

이준익

1959년 서울생.

잊힌 혁명가 ‘박열’과 민족시인 ‘동주’를 스크린에 불러내 일제강점기를 새 시각으로 돌아보게 한 영화감독.

주류를 조롱하며 비주류의 삶을 응원하는 변두리 인생의 대변자다.

세종대 회화과를 중퇴하고 영화 광고, 외화 수입, 제작을 두루 체험한 뒤 93년 ‘키드 캅’으로 감독 데뷔, 10년 만인 2003년 ‘황산벌’로 컴백해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평양성’ ‘사도’ 등 히트작을 내며 한국 영화사에 신기한 이야기꾼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제21회 춘사영화상 특별상(나눔상)을 받았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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