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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과 연금… 사우디 왕위승계 뒤의 왕자의 쿠데타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1일, 사우디아라비아 왕위 승계 1순위로 격상된 모하마드 빈살만 왕세자(왼쪽)과 2순위로 밀려난 모하마드 빈나예프 전 내무장관(오른쪽). 둘은 조카와 삼촌 사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캡처]

지난달 21일, 사우디아라비아 왕위 승계 1순위로 격상된 모하마드 빈살만 왕세자(왼쪽)과 2순위로 밀려난 모하마드 빈나예프 전 내무장관(오른쪽). 둘은 조카와 삼촌 사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캡처]

 ‘패밀리 쿠데타’

왕위 승계 1순위 바뀐 과정 속속 드러나 #NYT, 강압적 교체 정황 파악됐다고 보도 #"빈나예프를 왕궁으로 불러 승계 포기 강요" #축출된 빈나예프는 출국금지 등 연금상태 #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1)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한달 전 왕위 승계 1순위를 조카에서 자신의 친아들로 전격 교체한다고 발표했을 때, 왕가 밖에선 ‘패밀리 쿠데타’란 말이 조용히 퍼져나갔다.
사우디 왕가 권력 재편의 막전막후를 추적 보도해온 뉴욕타임스(NYT)는 19일(현지시간) “이번 왕위 승계 교체는 사실상 강압적으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0일 자정께 당초 사우디 왕위 승계 1순위였던 모하마드 빈나예프(57) 내무장관이 메카 왕궁으로 소환됐다. 그로부터 수시간 뒤 그는 왕위 승계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빈나예프는 처음엔 단호히 거절했지만 새벽녘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왕위 승계 1순위는 물론, 내무장관 자리에서도 물러나기로 했다.

NYT는 사우디 왕가 관계자와 복수의 미 당국자 취재를 통해 이같이 보도하면서 “빈나예프 내무장관은 왕궁에 들어서자마자 휴대전화를 빼앗겼고, 별도의 방에 혼자 남겨져 설득당했다”고 전했다.

같은 시각, 옆방에서는 왕세자 평의회가 열렸다. 이들은 “빈나예프가 2009년 외부의 암살 시도 사건으로 극심한 트라우마가 생겼고 약에 의존하는 등 국왕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이윽고 21일 동이 텄고, 살만 국왕은 자신의 친아들이자 제 2왕위 계승자인 모하마드 빈살만(31)을 제1왕위 계승자로 격상한다고 발표했다. 형제세습의 오랜 전통이 깨지고 부자세습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사우디 왕가는 1932년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연 이래 형제세습으로 왕위를 이어왔다.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서였다.

현 사우디 살만 국왕과 후임 왕위를 승계하게 된 그의 친아들 빈살만 왕세자. [FT 캡처]

현 사우디 살만 국왕과 후임 왕위를 승계하게 된 그의 친아들 빈살만 왕세자. [FT 캡처]

NYT는 “왕위 승계 교체가 외부에는 순탄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은 살만 국왕과 빈살만 왕세자의 치밀한 계획 속에 빈나예프가 축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빈나예프는 졸지에 26세 어린 조카에게 왕위를 내주게 됐다.

라마단 기간에 맞춰 메카에서 빈나예프 소환과 왕세자 평의회를 동시에 진행한 것도 쿠데타 맞춤용이었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20일은 이슬람권 성월인 라마단이 끝나던 시점이었다. 사우디 왕가는 라마단 기간 금식 등 의식을 치르기 위해 메카로 모여든다. 빈나예프의 왕권 포기를 받아내고 나머지 왕세자들의 추인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적합한 타이밍이었단 얘기다.
NYT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쿠데타처럼 라마단 기간은 권력 재편에 안성맞춤인 시기였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왕위 승계 교체가 발표된 직후 공식석상에 마주 선 빈살만 왕세자와 빈나예프는 귀엣말을 나눴다고 사우디 국영 통신사가 전했다.

왕위 승계 교체가 발표된 후 공식석상에서 만난 빈살만 왕세자(왼쪽)가 빈나예프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NYT 캡처]

왕위 승계 교체가 발표된 후 공식석상에서 만난 빈살만 왕세자(왼쪽)가 빈나예프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NYT 캡처]

“삼촌의 조언이 필요하다. 계속 도와달라”(빈살만)
“신의 가호가 있기를…”(빈나예프)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 빈나예프는 사실상 연금상태가 됐다. 국외 출국이 금지됐고, 압둘라지즈 알-후와이리니 장군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NYT가 앞서 보도했다. 빈나예프의 근황은 좀처럼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빈살만은 삼촌 빈나예프가 물러난 후임 내부장관에 자신의 측근인 압둘아지즈 빈사우드 빈나예프(34) 왕자를 임명했다.

사우디 권력 재편 한달 째,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사우디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NYT는 지적했다.
빈나예프의 왕위 승계에 맞춰 손발을 맞춰온 미 정계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빈나예프는 1999년 공직에 입문해 내무장관에 이른 베테랑이다. 특히 대테러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서방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반면 빈살만은 살만 국왕의 지시로 2015년 국방장관에 임명될 때까지 거의 무명이었다.
미국 한 당국자는 “빈나예프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수십년간 구축해왔는데, 빈살만 네트워크를 새로 구축해야할 판”이라고 말했다.

빈살만 왕세자가 지난 3월 미 백악관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FT 캡처]

빈살만 왕세자가 지난 3월 미 백악관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FT 캡처]

빈살만 왕세자의 호전적이고 조급한 성격, 승부욕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그가 국방장관에 오른 뒤 시작한 예멘과의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만 남긴 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왕위 승계 교체 이후엔 카타르 단교조치가 나왔다. 그러나 예멘 전쟁엔 돈만 들이붓는 꼴이고, 카타르 단교는 해법 없이 꼬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사우디 내부에선 빈살만 왕세자에 대한 지지도 적지 않다고 NYT는 보도했다. 사우디 인구의 3분의 2가 30세 이하인 상황에서 젊은층의 지지가 높다.
특히 극보수적인 사회를 탈피하려는 빈살만의 개혁 성향이 응원을 받고 있다. 또 석유에 의존하는 산업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한 장기 국가개혁프로젝트인 ‘비전 2030’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아직까진 받고 있다고 전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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