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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고혜련의 내 사랑 웬수(2) 부부란 이런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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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흔들리고 있다.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인륜지대사의 필수과목에서 요즘 들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과목으로 주저앉았다. 이미 결혼 한 사람들은 ‘졸혼(卒婚)’과 ‘황혼 이혼’도 서슴지 않는다. ‘가성비’가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된 이 시대, 결혼 역시 비효율의 극치며 불공정게임이란 죄목으로 심판대에 올랐다. 결혼은 과연 쓸 만한가, 아니면 애당초 폐기해야 할 최악의 방편인가? 결혼은 당장 ‘사랑해서’라기 보다 ‘사랑하기 위해’ 운명의 반쪽을 지켜가는 차선의 과정이라면서 파노라마 같은 한 세상 울고 웃으며 결혼의 명줄을 힘들게 지켜가는 선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사진 pixabay]

[사진 pixabay]

눈물·콧물 흘리며 서로 죽일 것처럼 싸우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밥을 함께 먹는 사이, 헤어지기 전까지는 몇 가지 비밀을 함께 갖는 사이, 남의 흉을 딥다 보고도 일러바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사이 좋을 때는 피를 나눈 부모나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 자면서 대화하는 사이, 상대의 속 깊은 신체 특징을 아는 사이, 잠들기 전 침대에서 씨름 한판 붙는 사이….

서로 묶여 오도 가도 못한 채 #어린 새끼를 유정하게 바라보는 사이

함께 침대에 누워 TV를 보며 연속극 주인공이나 정치인을 욕하고 흥분도 하는 유일한 이성 친구, 어쩌다 칫솔을 바꿔써도 토하지 않는 사이, 시뻘겋게 김칫국물을 떨어뜨린 상대의 밥도 챙겨 먹는 사이….

[사진 smart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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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에 앉아 휴지 달라고 소리 지르는 사이, 상대가 싫다는 데도 굳이 저 재미있다며 억지로 귀지를 파주는 사이, 먹은 게 같으니 배설물도 같은 걸 내놓는 사이,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해가 갈수록 얼굴·말투조차 닮아가는 사이….

내가 궁리해 본 부부는 이런 사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혼하면 누구에게나 그들만이 아는 갖가지 사이가 생긴다. 어느 한 여류시인이 토로한 사이 역시 부부가 어떠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유구한 세월, 그 수많은 나라 중 어느 한 나라, 그것도 동시대에 태어나 이렇게 함께 늙어가는 사람을 어찌 운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을 쌓은 거라는데.

[사진 smart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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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의 ‘부부’라는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부부란 서로 묶여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인 것이다.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중략)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 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를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문정희의 시 ‘부부’

그녀의 시는 진하다. 생활 속에서 체득한 진수가 우러나온다. 부부란 이런 것이리라.

고혜련 (주)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hrko3217@hotmail.com

[제작 현예슬]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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