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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아직은 말 잔치…채용공고 8만건 분석해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다음 달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출범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당시 "자율주행차·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핵심 기술을 적극 지원하겠다"며 공약했던 위원회다.

분주한 정부와 달리 학계 반응은 회의적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의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고, 정의도 모호하다"며 "논의가 수박 겉핧기 식으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그렇다면 업계·시장은 어떨까.

본지는 'AI 열풍'을 불러 일으킨 구글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2016년 3월)을 전후로 온라인 구인·구직업체 잡플래닛에 올라온 기업체 채용공고를 분석했다. 2016년 상반기~2017년 상반기 총 7만9500여건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적어도 채용시장에선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이렇다 할 만한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데이터 분석은 소셜네트워크 분석(SNA) 전문기업 사이람, 커뮤니케이션 전문기업 도모브로더의 도움을 받았다.

☞어떻게 분석했나
채용공고 중 구직자 자격 '필수 요건'과 '우대사항' 텍스트를 문단 단위로 쪼갠 뒤, 단어(두 글자 이상의 명사)를 추출했다. 이들과 4차 산업혁명 관련 핵심 단어들을 비교해 출현 빈도를 따졌다. 4차 산업혁명 관련 단어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산업(industry) 4.0, 인간과 기계' 보고서와 미국 IT(정보기술)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의 '2017년 10대 전략기술 트렌드' 보고서를 참고해 20개를 골랐다.

4차 산업혁명, 아직은 '찻잔 속 태풍'

2016년 상반기~2017년 상반기 사이 채용공고에 사용된 단어는 총 6만7400여개, 이 중 4차 산업혁명 관련 주요 단어 20개가 사용된 빈도는 약 3200회(0.47%)에 불과했다. 반기마다 증가세(0.4%→0.6%)를 보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극히 미미한 비중이다.

그나마 IT 업종은 전체 채용 건수 중 관련 단어가 자주 사용된 채용 건수의 비중이 1.2%로, 전체 평균(0.45%)을 배 이상 웃돌았다. 증가폭 역시 가장 컸다. 2016년 상반기 0.8%였던 비중이 올 상반기엔 1.4%까지 늘었다.

익명을 요구한 IT업계 대기업 인사팀장은 "최근 2~3년 사이 빅데이터·머신러닝·음성인식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을 가진 인력 수요가 확실히 증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외 업종에서는 4차 산업혁명 관련 단어 사용 비중이 미미했고, 증가세 또한 뚜렷하지 않았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펀드운용사 인사팀장은 "4차 산업혁명 관련 펀드를 출시했지만 관련 전문가는 충원하진 않았다"며 "로보어드바이저 같이 알고리즘 투자가 늘고 있지만, 아직 주류 투자법으로 자리잡진 못한 듯 하다"고 말했다.

"IT기술의 발달이 아직 경제 구조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진 못하고 있다"는 4차 산업혁명 회의론자들의 주장과 맥이 닿는 얘기다.

채용 공고에 등장한 4차 산업혁명 관련 단어는 주로 '머신러닝'과 '빅데이터'였다. 두 단어의 비중이 전체 50% 이상을 차지했다. 신진우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빅데이터와 이를 분석하는 기법의 하나로 머신러닝이 각광 받는 건 전세계적인 현상"이라면서도 "국내에선 이 두 기술에 대한 쏠림 현상이 도드라진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인공지능 관련 기술의 '종합예술'판은 자율주행차"라며 "사회 인프라와 자금력 있는 기업층이 두텁지 못해 이 기술은 채용공고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채용공고 분석 결과 '자율주행차'의 출연 빈도는 극히 낮았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은?

그렇다면 요즘 기업들이 구직자에게 원하는 능력과 자질은 무엇일까. 채용공고 중 '필수 요건'과 '우대사항'에서 추출한 단어를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비슷한 주제끼리 그룹으로 묶어봤다. 머신러닝의 하나인 토픽모델링 기법이다.

분석 결과 사업·기획과 개발, 컴퓨터 활용 능력 등이 주요 토픽으로 분류됐다. 이들 토픽에 분류된 단어는 전체 단어 중 각각 17%, 13%, 12%를 차지했다. 기업이 채용할 때 필수 요건과 우대 사항에 이들 주제와 관련된 단어들을 이 정도 비율로 많이 쓴다는 얘기다.

컴퓨터 활용 능력으로는 구체적으로 엑셀·문서 작성 능력 등이 꼽혔다. 데이터를 분석한 사이람의 배수진 연구원은 "여전히 기본적인 컴퓨터 활용이나 마케팅 같은 전통적인 직무능력이 주요하게 분류됐다"고 말했다. 또 "개발, 고객분석 같은 기술 중심의 변화가 일부 읽히긴 했지만, 여기서도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이 중요 단어로 꼽히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공개 채용공고만을 놓고 4차 산업혁명을 '찻잔 속 태풍'으로 보는 건 무리라는 반론도 있다.

장영주 잡플래닛 이사는 "소위 4차 산업혁명 기술 인력은 풀이 적고 기업의 수요도 아주 구체적이기 때문에, 공개채용보다는 헤드헌터를 통해 비공개로 뽑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다른 IT업계 인사 담당자 역시 "관련 인력을 채용할 땐 개발자 네트워크를 활용해 추천을 받거나 헤드헌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4차 산업혁명 관련 인력 수요가 아직 IT 업종에 국한돼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또 "공개 채용이 주된 취업 창구인 걸 감안하면, 일반 구직자들은 4차 산업혁명의 분위기를 체감하기 힘들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선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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