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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우리는 그렇게 여기에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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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

초등학교·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비교적 생생한데 중학교 3년간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때를 생각하면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려 서울로 공개방송을 ‘뛰던’ 모습과 자주 가던 만화방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최근 5권으로 완결된 만화 『여중생A』(허5파6 지음·비아북·사진)를 읽다가 기억 안쪽에서 잠자던 수많은 장면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장면은 그 시절의 나를 구원한 ‘낙원’이었다는 사실도.

만화의 주인공은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미래다. 집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시달리고, 학교에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 현실에서 겉도는 미래가 ‘유일하게 이해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인터넷 게임 속이다. 만화는 그런 ‘여중생A’ 미래의 고민과 방황,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와 현실의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다.

어느덧 잊혀졌지만, 당시에는 한없이 심각했다. 학년 초 누구와 밥을 먹어야 할 것인가부터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친구를 보며 ‘저 아이는 평생 이기지 못하겠지’ 낙심했던 기억, 나와 친한 친구가 다른 아이와 가까워졌을 때 느꼈던 배신감, 그리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따돌림과 그런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는 비겁했던 모습까지. 귀여운 그림체 속에 담긴 이야기는 리얼 그 자체다. 하지만 다행히 비관적이지는 않다. 미래는 그 안에서 다정한 이들을 만나 위로를 주고받고, 자신만의 ‘지속 가능한 낙원’을 찾기 위해 분투하며 씩씩하게 걸어나간다.

2015년 2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연재를 시작해 올해 6월 121화로 마무리된 인기 웹툰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다. 출판사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능하면 이 만화는 웹으로 보기를 권하고 싶다. 매회 댓글로 이어지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과 자기 고백이 작품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만 미래를 보며 힘을 낸다는 아픈 사연에서부터, 여중생A의 시절을 무사히 지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어른들의 고백까지. 댓글에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읽다 보면 이 댓글처럼 기원하게 된다. “어딘가에 있는 수많은 미래들을 위해 제발 미래가 행복했으면.”

이영희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