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화 한 번 안 내는 우리 아빠는요, 100점짜리예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2017 KBO리그 올스타전 시구·시타 행사에서 나선 이승엽 삼부자. 왼쪽부터 이승엽과 둘째 아들 은준, 큰아들 은혁. [대구=김민규 기자]

2017 KBO리그 올스타전 시구·시타 행사에서 나선 이승엽 삼부자. 왼쪽부터 이승엽과 둘째 아들 은준, 큰아들 은혁. [대구=김민규 기자]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갑자기 그쳤다. 구름 사이에 숨었던 햇살이 그라운드를 비췄다. 까만 하늘을 무심한 듯 바라보던 이승엽(41·삼성)의 얼굴도 그제야 환해졌다. 올 시즌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는 이승엽의 마지막 올스타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승엽의 마지막 올스타전 나들이 #두 아들 함께 삼부자 시구·시타 #아내 “아빠의 성실함 닮았으면” #야구 23년 동안 번 돈만 500억 #“박수 받으며 떠날 수 있어 행복”

이승엽은 지난 15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17 KBO리그 올스타전에서 두 아들과 함께 그라운드에 섰다. 첫째 은혁(13)은 투수, 둘째 은준(7)은 타자, 그리고 아빠는 포수가 됐다. ‘왼손잡이’ 삼부자(父子)는 올스타전의 시작을 알리는 시구·시타를 했다.

경기 전 은혁은 “공이 은준이 쪽으로 날아가면 안 될 텐데…”라며 걱정을 했다. 아버지와 연습을 많이 했지만 어린 동생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은준은 마냥 신이 나서 라커룸과 더그아웃을 누볐다. 럭비공처럼 튀는 막내 아들을 챙기느라 이승엽도 동분서주했다.

포수를 맡은 아버지 이승엽을 향해 공을 던진 은혁(가운데). 오른쪽은 둘째 은준. [연합뉴스]

포수를 맡은 아버지 이승엽을 향해 공을 던진 은혁(가운데). 오른쪽은 둘째 은준. [연합뉴스]

관련기사

마운드에 오른 은혁이 던진 공은 바깥쪽으로 살짝 빠졌다. 동생이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 그래도 아빠가 잡을 수 있을 만큼 빗나간 피칭이었다. 은준은 뒤뚱거리면서도 자기 키만한 빨간 배트를 휘둘렀다. 2만여 명이 모인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이승엽은 두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승엽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올스타전 이벤트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두 아들과의 시구·시타 이벤트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승엽은 “은혁이는 못 던졌다며 아쉬워하고, 은준이는 못 쳤다고 서운해하더라. 내가 보기엔 둘 다 잘했다”며 “두 아들에게 좋은 추억이 된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스타 헌정 유니폼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이승엽. [대구=연합뉴스]

올스타 헌정 유니폼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이승엽. [대구=연합뉴스]

시구·시타 행사가 끝난 뒤 구본능 KBO 총재는 이승엽에게 올스타전 헌정 유니폼을 전달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승엽은 “헌정 유니폼을 전달받았을 때 조금 울컥했다”고 털어놨다.

이승엽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지독하게 야구에만 몰두했던 지난 23년, 그는 한국야구의 홈런 기록을 모조리 새로 썼다. 또한 한국에서 15년, 일본에서 8년을 뛰며 총 500억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메이저리그에서만 활약한 박찬호(44·은퇴)·추신수(35·텍사스)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린 야구선수다.

둘째 아들 은준을 안고 장난치는 이승엽. [대구=김민규 기자]

둘째 아들 은준을 안고 장난치는 이승엽. [대구=김민규 기자]

이승엽이 야구에 전념하는 동안 가족들은 묵묵히 응원해줬다. 첫째 은혁은 “예전에는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빠가 빨리 은퇴했으면 좋겠다고 졸랐다. 그런데 지금은 좀 더 뛰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빠가 야구를 하면서 많이 힘들어 하셨다. 은퇴 후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지내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요즘 이승엽의 유일한 취미는 아들 은혁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다. 시즌 중이어서 함께 외출할 시간을 내지 못하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가족과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은혁은 “아빠는 화 한 번 내지 않는다. 친절하다. 100점짜리 아빠”라며 웃었다.

삼부자가 그라운드에 선 장면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는 이승엽의 아내 이송정씨. [연합뉴스]

삼부자가 그라운드에 선 장면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는 이승엽의 아내 이송정씨. [연합뉴스]

이승엽의 아내 이송정(35)씨는 관중석에서 시구·시타 행사를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았다. 이씨는 “(남편의 은퇴가) 이제 조금 실감이 난다”며 “두 아들이 아빠의 착한 성격과 성실함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기관리에 철저한 이승엽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정상에 서있다. 올해도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6개의 홈런을 기록 중이다. 이승엽이 혹독하리 만큼 자신을 채찍질한 과정을 부인 이씨는 누구보다 잘 안다. 이씨는 “야구선수로서 남편은 존경할 수 있을 만큼 큰 선수다. (야구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남편으로서는 80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 올스타전을 앞두고 이승엽은 홈런을 날리고 싶다고 말했다. 가족을 위한, 팬들을 위한 마지막 서비스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드림 올스타 5번·지명타자로 나선 이승엽은 6번이나 타석에 들어섰지만 홈런 없이 2루타만 1개 쳐냈다. 그는 “홈런을 치려고 계속 풀스윙을 했는데 뜻처럼 되지 않았다. 이제 나도 늙었나 보다”라며 웃었다.

이승엽은 “2000년대 초반에는 야구를 잘해서 행복했다. 지금은 박수를 받으면서 떠날 수 있어 더 행복하다”고 했다. 이날 이승엽은 두 아들과 더그아웃에서 함께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그라운드에 나란히 앉아 불꽃축제를 지켜봤다. 하늘 높이 떠올라 화려하게 터진 뒤 사라지는 불꽃은 이승엽의 뜨거운 야구인생 같았다. 팬들은 불꽃을 보며 이승엽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대구=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