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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기관 간 견제·균형 작동 안 하면 불행한 사태 반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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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호 05면

헌법학자 김진한이 말하는 헌법 사용설명서

1948년 5월 31일 서울 세종로중앙청 회의실에서 이승만 당시 의장(가운데)이 제헌국회 개원사를 하고 있다. 총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은 한 달 반 뒤인 7월 17일 제헌 헌법을 공포했다. 아래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전시된 제헌헌법 전문 조형물. [중앙포토]

1948년 5월 31일 서울 세종로중앙청 회의실에서 이승만 당시 의장(가운데)이 제헌국회 개원사를 하고 있다. 총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은 한 달 반 뒤인 7월 17일 제헌 헌법을 공포했다. 아래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전시된 제헌헌법 전문 조형물. [중앙포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홀에는 거대한 청동 부조가 있다. 재헌 국회의원 198명의 모습을 본떠 만든 조형물이다. 그 옆엔 이들이 만든 제헌 헌법 전문도 함께 전시돼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되는 370여 자 분량의 글이다. 이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국회를 통과했다. 5일 뒤인 17일 공포됐으며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사법부가 입법·행정부에 예속되면 #국민에게 가장 치명적인 권력 돼 #대법·헌법재판관 종신제 검토해야 #검찰·공정위·방송통신위 등 #장악 못하게 인사 권한 줄여야 #87체제 후 30년 헌법 잘못 사용돼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 통치 아닌 #지배자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한 국가를 탄생시킨 법이지만 지난 69년간 헌법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는 그 어느 법 조문보다 유명했지만 민주공화국의 외양을 하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됐던 과거 정권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간 국민에게 헌법이 선언적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인식돼 온 이유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기류가 달라졌다. 행정수도 이전, 정당해산심판, 간통죄 위헌 등 역사적 결정들이 헌법에 근거해 내려지면서다. 최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개헌 논의까지 진행되면서 헌법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 대한민국에서 헌법은 어떻게 쓰여야 할까. 헌법학자 김진한(49·사법연수원 29기) 전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의 쓰임새에 천착해 온 학자다. 2000년부터 12년간 헌법재판소 재판연구관으로 일했던 그는 현재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 중이다. 최근 저서 『헌법을 쓰는 시간』 출간차 일시 귀국한 그를 지난 14일 서울 사직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69주년 제헌절(17일)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헌법학자 김진한씨

헌법학자 김진한씨

권력은 어느 순간 백성 위험하게 만들어

헌법을 알고는 있어도 어디에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홍길동전 얘기부터 해 보자. 마지막에 홍길동이 사람들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율도국이란 나라를 세웠다. 소설은 거기서 끝나지만 그 후엔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 봐라. 자유와 정의를 찾아 나간 그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었을까. 제일 쉬운 건 홍길동을 왕으로 모시는 방법이다. 율도국 국민은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홍길동은 훌륭한 인물이라 당대에는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 왕, 그다음 다음 왕 때도 국민이 행복할지는 보장 못한다. 그 지점에서 나오는 대안이 왕이 백성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헌법을 만드는 것이다. 나라를 세우면 당연히 권력이 필요하다. 정의를 실현하고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권력이다. 그런데 권력은 가만히 놔두면 어느 순간 백성을 위험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헌법은 이런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다.”
헌법이 있어도 권력 남용이 많다.
“오늘날 민주국가든 독재국가든 헌법체계는 거의 유사하다.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다. 중요한 건 국민이 헌법을 알고, 제대로 작동하는 법이라고 믿느냐다. 형법 등 모든 법은 강제력을 갖고 있다. 사람을 죽이면 처벌받는 것이다. 헌법에는 집행력이 없다. 헌법을 어겼다고 잡아 가두진 않는다는 얘기다. 이는 헌법의 규율 대상이 다른 모든 법을 집행하는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최고권력을 통제하는 헌법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고 있어야 헌법에 힘이 실리고 제대로 작동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87년 6월 민주항쟁 전까지 40년간 우리나라에 헌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권력자들에게 헌법은 ‘어린이헌장’ 수준의 권고사항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통해 헌법이 개정됐고 권력을 제한하는 여러 장치를 설계해 넣으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김 전 교수는 헌법재판소 설립이 헌법을 실제 작동시키는 마중물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헌재 설립의 의의를 학창 시절 개인적 경험을 통해 설명했다.

“나는 86학번이다. 당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정말 참혹했다. 법을 전공했지만 법에 대한 실망이 가장 컸던 시기였다. 군 제대 후 90년부터 고시공부를 했다. 시험을 위한 기술적 법 공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헌법재판소가 내린 위헌결정문을 구해서 읽었는데 대단히 감동받았다. 군사독재 시기를 거쳐 온 내게 법률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폐지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힘이 그 막강한 권력자들이 만들어 낸 법을 무력화하나 싶더라. 더 놀라운 것은 권력들이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결정문에 쓰인 언어가 가진 논리와 설득력으로 승복을 이끌어 내더라. 어린이헌장처럼 생각했던 헌법이 실제 작동하는 걸 목도한 순간이었다.”

87년 체제 이후에도 권력 통제가 성공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맞다. 매번 임기 말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판을 받다 추락하는 일이 반복된다. 우리가 헌법에 관해 눈뜨기 시작했지만 구체적인 권력 통제기술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87년 체제 이후 30년간 헌법이 잘못 사용돼 왔다고 본다. 법치주의 원리가 대표적이다.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다. 그건 법가사상이다. 법치주의는 지배자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 할 때는 법에 따라서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국민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원칙으로 알려졌고 권력자들은 국민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했다.”

김 전 교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권력 통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가장 뼈 아픈 실패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결이 다르다. 그는 “평화적 촛불시위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하지만 성공에 취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박근혜 정부의 시스템이 무너질 때까지 어느 권력기관도 대통령의 권한 남용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탄핵에 이를 만큼 나라가 위기상황에 빠졌는데 제동을 건 사람은 없었다. 왜 권력기관 간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태가 또 반복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라고 다를까. 아니라고 본다. 어떤 권력이든 남용의 요소가 있고 사악한 요소가 있다. 권력은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제도의 문제다.”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권력 분립을 정교하게 해야 한다. 3권 분립에서 입법·행정부의 권력은 사법부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여당 최고권력자가 대통령이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한 몸이 된다는 얘기다.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기 어렵다. 여기에 사법부 독립마저 취약하다. 사법부는 민주적 정당성이 없어 가장 힘이 약하다. 하지만 입법·행정부에 예속될 경우 국민에게 가장 치명적 권력이 된다. 사람을 잡아 가두고 재산을 빼앗는 권력이라서다. 사법부가 행정·입법부와 결탁해 죄 없는 사람 한두 명 벌주기 시작하면 모든 국민을 장악하는 건 순식간이다.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한 건 그래서다. 3권 분립의 소금과도 같다.”

사법부만 제대로 작동해도 권력 통제 가능

형식적으로는 독립돼 있는데.
“더 정교하게 해야 한다. 우리 문화적 특수성이 있어서다. 이건 사법부 독립만의 문제가 아니라 검찰의 독립, 제왕적 대통령, 공무원의 복지부동 등 우리 민주주의 실패의 근원적 원인에 해당되는 문제다. 우리 정서 중엔 인정 욕구가 매우 크다. 승진하고 싶고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상사가 부당한 요구를 해도 거부하기보단 인정받기 위해 따른다. 불법적 요구를 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지시를 해도 받아들인다. 더 높은 자리로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 작동의 가장 큰 장애다. 문화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만큼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어떻게 바꿔야 하나.
“두 가지가 있다. 우선은 출세욕을 자극하지 않게 인사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입법·행정부, 특히 대통령 인사 권한부터 줄여야 한다. 검찰·공정거래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 등을 대통령과 여당이 장악할 수 없게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또 하나는 사법부 권한을 키워 주는 것이다. 사법부만 제대로 작동해도 입법·행정부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대법관·헌법재판관의 임기를 종신으로 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최소한 10년 이상이어야 한다. 권력은 오래 독점하면 부패한다. 하지만 미국이 대법관을 종신제로 운용하는 건 그걸 몰라서가 아니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법부의 독립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으레 임기가 짧을수록 좋다고 본다. 대법관·재판관 자리를 하나의 벼슬자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해야 된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선 안 된다. 사법부의 수장은 입법·행정부 권력의 부당함을 통제하고 견제하는 자리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임기를 늘려 입법·행정부에 예속되지 않게 힘을 실어 줘야 한다. 그렇게 개정할 때만이 더욱 튼튼한 사법부, 대통령과 행정권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가능하다.”

2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김 전 교수는 이 말만은 꼭 남기고 싶다고 했다. 노동시간을 줄이는 문제다.

“한참 헌법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나는 이게 오히려 핵심이라 생각한다.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헌법을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국민이 헌법을 잘 알고 헌법에 대해 토론하고 헌법에 대해 꿈을 꿔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생각할 시간이 너무 적다.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다. 퇴근 후 남는 시간도 술을 마시다 보낸다. 그러다 보니 정치를 권력을 잡는 일종의 격투기로 인식하고 승패를 가리기 위한 스포츠로 본다. 박 전 대통령 탄핵에까지 이른 우리 민주주의 실패와 헌법의 오작동은 어쩌면 이런 우리 삶의 방식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헌법을 생각하는 국민을 키우지 않으면 이는 반복될 것이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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