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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4) 임사홍과 연산군] 간신의 헌신에 눈 멀면 다 망해

중앙일보

입력

 임사홍, 정적에게 복수하려 연산군과 갑자사화 공모 … 간신은 충신의 가면 쓰고 사리사욕 채워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연산군의 패악을 다룬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 김강우.

연산군의 패악을 다룬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 김강우.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이 병석에 눕자 병문안을 간 임금 환공(桓公)이 물었다. “그대 대신 누구에게 재상을 맡겨야 하겠소?” 관중이 답했다. “임금보다 신하를 잘 아는 분은 없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역아(易牙)가 어떻소?” 관중이 말했다. “역아는 자기 자식을 죽여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려 한 자입니다.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으니 절대로 안 됩니다.”

환공의 음식을 담당했던 역아는 ‘사람의 고기만 아직 맛보지 못했다’는 환공의 농담에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 요리해 바친 인물이다. 환공은 임금을 위해 자식의 목숨을 바친 역아의 충성심에 감탄했지만, 관중은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 자식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자가 장차 무슨 짓을 못하겠냐며 당장 내쳐야 한다고 간언했다. 그러나 관중의 충언을 듣지 않은 환공은 역아를 비롯한 간신들을 중용했고 이들의 농간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자식 버린 임사홍

이 같은 사례는 조선에도 있었다. 측근 임사홍(任士洪, 1449~1506년)의 집을 찾은 연산군은 ‘요순(堯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어찌하여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재난과 불행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도 모르고/ 오랑캐를 막겠다며 공연히 만리장성을 쌓았구나!’라고 쓰여진 병풍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고 물었다. 임사홍이 자신의 아들 임희재(任熙載)의 글씨라고 말하자 연산군은 화를 내며 말했다. “경의 아들은 불초한 자다. 내가 죽여야겠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진시황에 빗대어 자신을 비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임사홍은 “희재의 성질과 행실은 전하의 말씀처럼 온순하지 못합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고 답한다(연려실기술). 자식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 임희재는 유배를 갔다가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능지처참을 당했다(연산10년 10월 28일). 그는 사림(士林)의 영수 김종직의 제자로서 아버지와는 다른 정치노선을 걸었는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김종직 계열의 선비들이 대거 목숨을 잃었을 때 여기에 함께 연루된 것이다. 임사홍은 이 과정에서 자식을 구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앞장서서 자식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임금을 위해서는 천륜인 자식까지 버릴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아들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연산군은 이러한 임사홍을 매우 아꼈는데, 자식을 바쳐 권세를 탐하는 자는 임금을 망칠 것이라는 관중의 경고대로 임사홍은 연산군의 폭정을 더욱 악화시킨 희대의 간신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임사홍이 처음부터 이렇게 간악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학생 신분으로 세조 앞에서 유교 경전을 강론했을 정도로 총명함을 인정받았고(세조11년 10월 15일), 인품과 능력이 뛰어나다며 세종의 작은 형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임금에게 직언을 잘 올렸고, 당대의 저명한 학자 최항은 문장과 언어가 훌륭한 젊은 인재로 그를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성종2년 2월 1일). 임사홍은 성종 대에 들어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1475년(성종 6년)에는 그의 아들 임광재가 예종의 딸 현숙공주에게 장가들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런 그를 질시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1478년(성종 9년) 대간이 흙비가 내렸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하늘의 견책을 두렵게 여기고, 술 마시는 것과 활 쏘는 것 등을 금하라고 요청하자 임사홍은 흙비는 재이(災異)가 아니라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다(성종9년 4월 21일). 그러자 임사홍을 탄핵하는 상소들이 빗발치듯 쏟아진다.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이것을 임금에게 보내는 하늘의 경고로 여겨 스스로를 반성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확인하는 것은 유교에서 매우 중시하는 부분이었다. 임사홍은 이를 부정해 임금을 망치려 들고 있다는 것이다. 임사홍에 대한 공격은 매우 매서웠는데 역적에 준하는 죄로까지 치부되었다. 이는 임사홍의 잘못에 비해 과도한 감이 없지 않은 것으로, 왕실의 인척이자 성종의 총애를 받은 임사홍을 제압하겠다는 의도로 읽혀진다. 훗날 권신(權臣)이 될지도 모를 싹을 뽑아버리겠다는 것이다. 평소 임사홍이 자신의 총명함을 믿고 겸손함이 부족했던 것도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결국 임사홍은 삭탈관직돼 국경의 최북단 의주로 유배를 떠났고 8년이 지난 성종 17년이 되어서야 사면되었다(성종17년 3월 6일). 이때에도 대간을 비롯한 신하들은 그의 복권에 반대하고 그에게 계속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청했는데, 성종 19년 임사홍에게 절충장군 부호군의 벼슬이 내려지자 이름뿐인 한직이었음에도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채홍사 맡아

임사홍은 이러한 파란을 겪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자신을 공격한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던 것 같다. 15년 가까이 정치적 파산상태에 놓이면서 느낀 결핍과 불안은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낳았고, 자신의 권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왜곡된 의지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1491년(성종 22년) 자신의 딸 휘숙옹주를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와 혼인시키면서 이러한 임사홍의 욕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휘숙옹주는 이복오빠인 연산군의 어여쁨을 받았다는 점에서 연산군과 임사홍을 연결해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재기하는데, 실록에 따르면 이 때 임사홍이 “왕의 뜻을 짐작하고 조정을 위협하는 술책을 아뢰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숭품(崇品, 종1품)에 발탁하고 수시로 불러 접견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에게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연산12년 9월 2일). 임사홍이 임금의 뜻에 철저히 부합해 연산군의 공포정치를 위한 계책을 제공하였으며, 연산군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앞장섰다는 것이다. 연산군의 유흥을 위해 전국의 미녀들을 징발하는 채홍사를 맡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임사홍은 연산군의 친모 윤씨가 중전에서 폐위당할 당시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한 바 있다(성종8년 3월 30일). 따라서 연산군은 임사홍을 더욱 신임했던 것이고, 연산군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사홍은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공동연출로 갑자사화라는 참극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임사홍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했고 임금을 더욱 나쁜 길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사홍이야 워낙 죄질이 나쁘기 때문에 누가 봐도 간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 간신은 충신의 가면을 쓰고 임금에게 다가온다. 임금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고, 임금이 하고자 하는 일에 앞장서고,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빠짐없이 챙겨주니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충신처럼 보이는 것이다.

간신이 바치는 헌신은 절대로 주군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고 그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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