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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침묵하면 갑질 안 끝날 것 같았다"...‘을’의 반격에 종근당 갑질 폭언 수사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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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의 가장이니까, 매일 욕을 듣더라도 참았죠. 그런데 뒤차가 박아서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안전 부주의’라고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고, 하루 5분 늦었다고 ‘다시는 늦지 않겠습니다’를 100번 적는 ‘깜지’를 써냈습니다.”

"5분 지각에 반성문 깜지 적어 내"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도 목소리 #전문가 "을의 반격 더 거세질 것"

종근당 이장한(65) 회장의 전직 운전기사 A(36)씨는 14일 이 회장의 발언을 녹음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며 힘들었던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녹음 파일을 공개한 이유를 묻자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고 답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녹음 파일 8개가 남아있다. 그는 “전담 기사를 맡은 9개월 동안 반성문만 6차례 제출했다. 너무 치욕스러웠다”고 말했다.

A씨의 뒤를 이어 지난 4월부터 이달 초까지 이 회장을 수행한 B(46)씨는 “내가 침묵하면 이 회장의 ‘갑질’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B씨는 폭언에 시달리다 지난 5일 이 회장과의 대화를 녹음한 뒤 당일 퇴사했다.

A씨와 B씨가 본지에 제공한 녹음 파일에는 이 회장이 “이 XX가 대들고 있어 이게. 주둥아리 닥쳐.” “너는 생긴 것부터가 뚱해가지고 자식아. XX 같은 XX, 애비가 뭐하는 놈인데” 등의 폭언이 담겨 있다.

종근당 관계자는 “회장의 폭언 사실은 인정한다”면서도 “반성문은 운전 부주의에 따른 경위서를 제출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깜지는 확인되지 않는 말이다”고 해명했다.

이 회장은 14일 오전 10시쯤 기자회견을 열고 “상처를 받으신 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갑질 폭언’에 대한 비난 여론은 불매 운동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날 종근당의 주가도 하락했다. 전 거래일 대비 3.36% 내린 11만5000원에 마감됐다. 직장인 배상진(30)씨는 “기업인의 마인드가 건강해야 그 회사의 제품도 믿을 수 있다. 앞으로 갑질하는 기업인이 이끄는 종근당의 약품은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 직후 종근당 본사 앞에서 규탄 시위를 연 한 시민단체는 "서울 서부지검에 이 회장을 고발하고, 국가인권위원회와 고용노동청에도 조사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경찰도 내사에 착수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피해 사실을 언론에 제보한 운전기사를 상대로 '이 회장이 운전기사들에게 폭행·협박 및 폭행·협박을 수단으로 불법 운전을 지시한 사실이 있는지' 등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할 계획이다.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제보자 외에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 여부도 면밀히 조사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축적된 ‘을’의 목소리 폭발

운전기사에 폭언으로 물의를 빚은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14일 서울 충정로 종근당 본사 대강당에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상선 기자

운전기사에 폭언으로 물의를 빚은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14일 서울 충정로 종근당 본사 대강당에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상선 기자

우리 사회 깊숙이 숨겨져 있던 ‘갑’의 횡포가 ‘을’의 목소리로 하나 둘 폭로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갑질에 맞서는 ‘을의 반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을의 ‘무기’ 역할을 하고 있다. 큰 돈을 들이거나 힘을 동원하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나 녹음과 촬영이 가능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녹음을 최초로 제보한 장씨는 “전임 기사였던 A씨에게도 증언을 부탁하니, 그에게도 녹음 파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갑이 을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회가 이젠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친척 회사를 중간 납품업체로 끼워 넣어 이른바 ‘치즈 통행세’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MP그룹(미스터피자)도 가맹점주의 폭로로 ‘갑질 영업’이 세상에 알려졌다. 정우현 MP그룹 회장은 지난 3일 대국민사과를 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검찰에 구속됐다.

회장이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호식이두마리치킨은 임금 지급을 미루고 수당을 치킨 교환권으로 주다가 가맹점주들의 적극적인 제보로 고용노동부의 시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지난 11일에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의 모임인 ‘전국가맹점주협의회연석회의’ 관계자들이 서울중앙지검 앞에 모여 ‘갑질 횡포’의 부당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전국가맹점주협의회연석회의 관계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중앙지검 앞에서 갑질의 횡포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가맹점주협의회연석회의 관계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중앙지검 앞에서 갑질의 횡포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 상반기 이같은 갑질 횡포와 관련한 분쟁 조정신청이 급증했다. 한국공정거래조정원이 올해 상반기에 접수한 유사 사례(거래상 지위 남용을 통한 불이익 등에 대한 일반불공정거래)는 393건으로 전년 동기(243건) 대비 62% 늘었다. 처리 건수 역시 전년 동기(183건)보다 96% 급증한 358건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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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반격이라는 분석에 대해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갑을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이 되고, 처리 과정이 축적되면서 더이상 갑질을 감내하지 않겠다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새 정부의 ‘갑질 근절’ 의지에 기대감이 모아지면서 을들의 반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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