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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채용’의 그늘…사진관 주인들 "이력서 사진 없애면 사진관 다 죽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광주광역시에서 30년 넘게 사진관을 운영 중인 채만수(64)씨 명함에는 가족사진·리마인드 웨딩·프로필(증명) 사진·이미지 사진 등 그가 취급하는 사진 종류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즘 채씨가 주로 찍는 건 이력서에 쓰는 증명사진이나 여권사진이다. 다른 사진은 손님이 몇년 새 급격히 줄었다.

"요샌 다들 프로예요.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가족사진이든 웨딩사진이든 셀프로 다 잘 찍으니까. 물론 사진관이 쇠퇴하는 시대적 흐름 자체를 부정할 순 없어요. 그렇지만…."

착잡한 표정으로 채씨가 말을 이어갔다.
"이런 환경에서 사진관 주인들은 하루에 증명사진 2~3번 남짓 찍는 걸로 먹고 살거든요. 이것마저 나라에서 못찍게 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한국프로사진협회 회원들이 13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정부의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방안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한국프로사진협회 회원들이 13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정부의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방안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채씨는 13일 새벽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에서 열린 '한국프로사진협회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최근 정부가 발표한 '블라인드 채용' 추진 방침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로 모였다. 한국프로사진협회는 채씨처럼 전국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8000여 명의 업주들로 구성돼 있다.

앞서 정부는 지난 5일 올 하반기부터 정부 기관 채용 때 입사지원서에 얼굴 사진을 붙이지 않고 출신지역·신체조건·학력 등을 적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 방안'을 발표했다. 변성완 행정자치부 지역경제지원관은 "블라인드 채용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출신학교나 출신지에 대한 편견으로 탈락해서는 안 되도록 하는 것"이라며 "149개 지방공기업과 663개 지방 출자ㆍ출연 기관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적극 이행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해 관계가 걸린 당사자들은 심경이 복잡하다. 특히 사진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50여 명의 사진관 업주들은 "문재인 정부의 '이력서 사진부착 금지' 방안은 스마트폰 카메라 등의 발달로 여권사진과 이력서 사진 정도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동네 사진관들을 무너뜨리는 행위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국세청에 등록된 사진관 업체는 약 1만5000곳이다.
이재범(65) 비대위원장은 "10년 전에 비해 4분의 1 수준으로 사진관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 역시 서울 사당동에서 40년 동안 사진관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같이 일하는 직원이 3~4명 정도는 있었는데 3년 전부터 수입이 변변치 않아 혼자 사진관을 지키고 있다. 현재 전국에 있는 사진관 중 70%는 영세한 동네 사진관들인데 증명사진까지 못찍으면 정말 다 망한다. 이건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골목상권 살리기' 정책에도 역행하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한국프로사진협회 회원들이 13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정부의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방안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한국프로사진협회 회원들이 13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정부의 이력서 사진 부착 금지 방안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기자회견에서 비대위 회원들은 성명서를 통해 "기업이 기초 심사 자료에 사진부착을 요구하는 건 많은 인원이 동시에 지원하는 공개채용 과정에서 신원을 정확히 확인해 대리시험을 방지하는 등 공정하고 투명한 채용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일자리 창출 역행하는 정부는 각성하라"고 마무리 구호를 외쳤다. 구호 말미에 누군가는 "같이 살자"고 절규하듯 소리쳤다. 비대위는 고용노동부 등 블라인드 채용 관련부처 네 곳에 면담을 요청했다. 이들은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대규모 상경집회와 시위 등 더 강도 높은 항의 행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상장사 918개 기업을 대상으로 '신입 채용 평가시 이력서 사진이 필요한지' 물었을 때 대기업의 59.4%는 "(이력서 사진이) 꼭 필요하다"고 답했고 중견·중소기업도 60% 이상이 같은 입장을 전했다.

취업준비생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올해 졸업을 앞둔 대학생 김모(25)씨는 "보통 사진관에 가면 '이력서용 사진 촬영 상품'이 따로 있는데 이건 피부 보정·포토샵 등을 해주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어 가격이 부담됐던 것이 사실이다. 찍고 나서도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아 괜히 자괴감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지난달 취업포털 사람인이 취업준비생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37.1%는 '이력서 사진 촬영비'가 취업 준비할 때 가장 아까운 비용이라고 답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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