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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지식의 최전선 … 천지개벽 시작하는 책방·도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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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김환영의 지식의 현장

출판업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굴뚝 산업’으로 볼 수도 있다. 달리 보면 출판업은 지식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성장의 엔진이다. 출판의 결과물인 책들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독자들과 만난다. 공생 관계인 출판사·도서관·서점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서울 강남 COEX에 있는 별마당도서관과 중구 순화동에 있는 종합 문화공간인 순화동천을 찾았다.

세계의 도서관·서점들 앞다퉈 #독자에게 새로운 체험 선사해 #별마당도서관은 기부문화 체험 #순화동천은 신나는 토론 체험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매거진(NGM)의 국제판 담당 에디터였던 버나드 오해니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NGM의 라이벌은 누구인가.” 오해니언 에디터는 “딱히 경쟁자는 없다. 인간의 시간을 빼앗는 모든 것이 NGM의 경쟁자”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책 볼 시간을 스마트폰에 빼앗기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고도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게 나름 알차게 보낼 수 있다. ‘왜 내가 책을 사서 읽어야 하지’라는 질문은 사실 답하기 힘들다. 답을 찾아 현장으로 가봤다. 가기 전에 한 가지 어설픈 가설을 세웠다. 이거다. ‘도서관이나 책방은 스마트폰에 없는 새로운 체험을 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가설 확인을 위해 떠나기 전에 주목할 만한 해외 사례 두 곳을 먼저 소개해본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엘아테네오’ 책방은 애서가들이 ‘세계 제8대 불가사의’라 부른다. 1919년에 처음 생긴 이곳은 원래는 공연 시설이다. 책방으로 탈바꿈한 후 한 해 1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됐다. (참고 : https://www.youtube.com/watch?v=ZMICP-noKus)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대학출판사(PUF) 책방은 면적이 72㎡에 불과하다. 책이 없는 책방이다. 하지만 300만 종의 책 중에서 책을 골라 주문하면, 마치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가 나오듯 5분 만에 인쇄기에서 책이 뚝딱 나온다. 신기한 볼거리다. (참고 : https://www.youtube.com/watch?v=igq1GhfklMk)

5월 말에 개장한 별마당도서관은 서울의 랜드마크로 급부상했다. 시민의식과 기부문화의 모범 사례다. 소장 도서 5만 권 중 2만2000권을 일반 시민이 기증했다. 책을 집어가는 시민은 극소수다. [김상선 기자]

5월 말에 개장한 별마당도서관은 서울의 랜드마크로 급부상했다. 시민의식과 기부문화의 모범 사례다. 소장 도서 5만 권 중 2만2000권을 일반 시민이 기증했다. 책을 집어가는 시민은 극소수다. [김상선 기자]

별마당도서관은 ‘거대한 책의 실내 계곡’ 같은 모양이다. 이곳에서는 물 대신에 지식이 흐른다. 책 5만 권이 있다. 그중 일반 시민이 2만2000권을 기증했다.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386세대 사람들은 종로서적에서 만나 식사나 차, 술을 한잔 하기 위해 이동했다. 여기서는 COEX의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된다. 어쩌면 별마당도서관은 종로서적의 21세기 버전 후계자다.

‘독서 데이트’ 중인 황서진·채서현 커플을 만났다. 오늘 처음 왔다고 한다. 그들의 평가는 이랬다.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좋다. 시간이 되면 다시 올 생각이다. 주변에 도서관이 딱히 없는 데다 무료로 굉장히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어서 좋다. 책 읽다가 밥을 먹을 수도 있고··· 하루를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 공간이다.” 둘은 저녁에는 COEX 내에 있는 아쿠아리움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별마당도서관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아테네오처럼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될 수 있을까. 별마당도서관에서 만난 에드워드 박 어도비 블러프스 초등학교(미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소재) 교장을 만나 이야기해 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박 교장은 이민 1.5세다. 여덟 살에 미국으로 갔다. 박 교장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이런 공간은 드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공간 안에서 책도 읽고 쉬고 대화도 나누고···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 같다.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관광 자원 가능성에 대해서는 “당연히 가능성이 있다. 콘셉트가 좋다. 샌디에이고에도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남의 장소나 관광 볼거리이기도 하지만 일단 별마당도서관은 도서관이다. 모두 열심히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담소하는 환경에서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시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음이 오히려 독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뇌가 소음에 저항해 집중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별마당도서관의 총면적은 2800㎡다. 인문예술공간을 자처하는 순화동천(巡和洞天)은 1818㎡다. 순화동천의 존재 이유는 ‘생각의 힘을 키우는 독서’다. 서울 중구 순화동 덕수궁롯데캐슬 컬처센터에 있는 책 박물관이자 갤러리이자 강연 장소다. 박물관 입장료는 6000원이다. 특히 18세기 유럽 장인들의 풍자정신, 책의 콘텐트를 빛나게 하는 삽화가 인상적이다. 별마당도서관이 가벼운 여행객의 마음으로 가면 된다면, 순화동천은 예습하고 가는 게 좋다. 개관 기념 프로그램인 ‘윌리엄 모리스전’ ‘귀스타브 도레전’ ‘권력과 풍자-19세기 프랑스 풍자화가 4인전’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선행학습이 필요하다.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있는 순화동천은 전시강연 프로그램을 통해 책 문화의 중심을 꿈꾼다. [김상선 기자]

서울 중구 순화동에 있는 순화동천은 전시강연 프로그램을 통해 책 문화의 중심을 꿈꾼다. [김상선 기자]

순화동천을 만든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우리 사회의 디지털화가 너무 심해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본다. 40여 년 동안 3000여 권의 책을 만든 그는 애서가들이 모여 신나게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순화동천을 만들었다. 순화동천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를 표방한다. 김 대표는 순화동천이 성공해 서울 곳곳에 지친 현대인들이 쉴 수 있는 북센터가 들어서기를 기대한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30~6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4개는 강연 프로그램이 있는 날에는 꽉 찬다. 평소에는 한산하다. 점심 때 40명, 저녁 때 20~30명 정도다. 이곳 카페는 오후 7시에 문을 닫는다. 병맥주도 판다. 한잔하면서 책을 읽는 체험도 특별하다.

세계의 첨단 기술 경제를 이끄는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에 있는 팰로앨토는 인구가 7만 명이 안 되지만 도서관이 5개 있다. 국민의 독서력, 독서량이 곧 국력이요 경제력이다. 한국의 출판 시장은 세계 10위권이다. 출판 시장 규모는 경제력에 비례한다. 독서는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책의 힘에는 국력과 개인의 힘을 강화하는 ‘흘러넘치기 효과(spillover effect)’가 있다. 도서관과 책방은 계속 진화하면서 새로운 신기한 체험으로 우리를 독서의 세계로 유혹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독서 체험은 책의 탄생 이래 불변이 아닐까. 책 속에서 나와 세상을 발견하는 신기한 체험 말이다.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