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학벌이 뭔 소용이냐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뜻은 좋지만 실행 방법이 졸렬해 망하는 일도 숱하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이 공무원·공공부문에서 하라고 한 블라인드 채용제가 이런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까 두렵다. 문 대통령은 블라인드 채용제를 놓고 이렇게 역설했다. “명문대 출신이나 일반대 출신이나, 서울의 대학 출신이나 지방대 출신이나 오로지 실력으로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블라인드 채용, 준비 소홀로 부작용 우려 #주먹구구식 운용으로 깜깜이 채용 될 판

블라인드 채용이란 성별·인종·학벌 등의 편견으로 알짜배기 인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식이다. 서류심사·면접 등에서 선입견을 낳을 수 있는 정보를 차단해 공정성을 기하자는 거다.

유명한 사례는 캐나다의 토론토심포니오케스트라(TSO) 케이스. 1970년대 초 TSO는 거의 모든 단원이 백인 남성이었다. 심각성을 느낀 재단은 커튼을 치고 장막 뒤에서 연주토록 한 후 단원을 뽑았다. 그랬더니 절반은 여성, 절반은 유색인으로 채워지면서 TSO는 더 황홀한 선율을 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성별·인종·나이는 물론 출신 학교도 안 보는 기업이 늘었다. 갭점퍼스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는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짜게 한 뒤 이것만으로 직원을 뽑아 혁신에 성공했다. 번지르르한 명문대 간판에 홀려 ‘소프트웨어 덕후’들을 놓치는 실책을 방지했던 거다.

하지만 이들 성공 사례에서 결코 빠뜨려선 안 될 공통분모가 있다. 진짜 실력을 알 수 있는 적절한 평가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블라인드 채용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인 셈이다.

우린 어떤가. 조만간 이 제도가 사용될 332개 공공기관과 149개 지방 공기업의 경우 주먹구구식 운용으로 무늬만 블라인드 채용일 위험이 크다. 출신학교와 성적도 안 보면서 졸속 선발 방식을 쓰면 영락없이 ‘깜깜이 채용’이 될 수밖에 없다.

이달 중 채용형 인턴을 뽑는 코레일을 보자. 일반공채 응시자들은 지원서와 함께 A4 용지 한 장 남짓한 소개서를 내야 한다. 블라인드 채용 원칙에 따라 성적은 물론 출신학교도 쓰면 안 된다. 2단계는 IQ 테스트 비슷한 직무능력평가(NCS). 여기에서는 선발 인원의 2배수를 합격시킨다. 최종 관문은 면접시험으로 10~12분씩 인터뷰한 뒤 인성검사 결과와 합산해 합격자를 뽑게 돼 있다.

유의할 대목은 면접 때에도 출신 학교, 가족 관계 등을 물어선 안 된다는 거다. 그러니 10분 남짓한 인터뷰로 어떻게 한 인간의 능력을 알 수 있겠는가. 십중팔구 첫인상이 당락을 가를 판이다.

그간 우리의 대입제도는 수능과 같은 입시보다 학생부를 중시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단 한 번의 필기시험보다는 얼마나 학교 생활에 충실했는지를 보는 게 타당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가 밀어붙이는 블라인드 채용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고교 시절, 나의 은사는 명문대를 가라며 이렇게 일러주셨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나 사람들은 이를 통해 네가 학창시절, 얼마나 성실했는지 판단할 거다”라고.

학력과 성적은 삶의 궤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믿을 만한 지표 중 하나다. 그걸 깡그리 무시한 채 한 장짜리 소개서에, IQ테스트 비슷한 시험, 그리고 10분 남짓한 면접으로 사람을 골라내는 게 과연 온당한가.

구글은 평직원을 뽑으면서도 25번 인터뷰를 한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참 실력을 알아낼 방법을 써야 블라인드 채용에 의미가 있다. 이러다간 첫인상이 중요해져 성형외과만 살판나는 세상이 올지 모르겠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