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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졸음운전에 숨진 부부, 석 달 뒤면 첫 손자 안을텐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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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신모(58)씨와 설모(56)씨 부부는 봉제공장 오른쪽 구석 자리를 썼다. 17년차가 막내인 이 공장에서 최고참 봉제사가 앉는 자리였다. 신씨 부부는 9일 오후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김모(51)씨가 몰던 광역버스가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양재나들목 근처에서 부부가 탄 K5 승용차를 추돌했다. 이 승용차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졌고, 부부는 현장에서 숨졌다.

동료들이 말한 안타까운 사연 #봉제공장서 마주 보며 20년 근무 #남편 신씨, 신장 투석하면서 일해 #지각 한 번 안 할만큼 성실한 부부 #어려운 동료 위해 전세금 돕기도

신씨 부부가 사용한 봉제공장의 작업대. 재봉틀이 있는 쪽이 부인이 일한 곳이었고, 가위가 놓인 쪽이 남편의 작업 공간이었다. [최규진 기자]

신씨 부부가 사용한 봉제공장의 작업대. 재봉틀이 있는 쪽이 부인이 일한 곳이었고, 가위가 놓인 쪽이 남편의 작업 공간이었다. [최규진 기자]

사고 하루 만인 10일 오후 찾아간 서울 용두동 2층의 봉제공장에는 신씨 부부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부부가 쓰던 재봉틀은 멈춰 있었지만 바로 옆에는 손때가 묻은 가위와 재봉 도구들, 신씨가 먹던 약봉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신씨는 혈액 투석을 받아왔다. 주말 나들이는 부부의 유일한 ‘호사’였다. 신씨 부부는 이 공장에서 20년째 마주 보며 일했다. 부인 설씨가 재봉틀로 박음질한 옷감을 넘기면 맞은편의 남편 신씨가 넘겨받아 옷감을 가위로 다듬은 뒤 다리미로 펴는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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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버스의 블랙박스 영상에 찍힌 추돌 당시 상황. 버스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앞 승용차를 들이받아 파편이 날린다(위). 왼손으로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버스 기사는 사고 순간 양손으로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아래 왼쪽). 승객들은 앞자리 의자에 머리를 부딪혔다(아래 오른쪽). [사진 서초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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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쓰던 작업대 위에는 공책 한 권도 있었다. 부부는 여기에 매달 자신들이 일한 양을 적어 월급을 받았다. 공장 사장이 있긴 하지만 일한 만큼 가져가는 구조라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부부는 6월에도 공책이 빼곡하게 찰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신씨 부부는 석 달 뒤 손자를 안을 수 있었다. 며느리의 출산이 10월로 예정돼 있다. 신씨의 인척 A씨는 “힘들게 고생하면서 살다가 좀 있으면 외아들 부부가 낳은 손자를 볼 텐데 갑자기 날벼락을 맞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직장 동료 이순미(47)씨도 “설씨가 얼마 전에 며느리로부터 생일상을 받고 좋아하던 게 기억난다. 이제 곧 손자를 보게 되었다며 자랑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떴다”고 말했다. 동료 지인숙(47)씨는 신씨 부부를 아낌 없이 베풀던 동료로 기억했다. 지씨는 “월세방에서 사는 처지였는데 언니(설씨)가 빌려달라고 한 적도 없는 돈 1000만원을 전세금에 쓰라며 건네줬다. 더 필요하면 말하라던 목소리가 잊혀지질 않는다”며 울먹였다. 부부는 출근길마다 동대문시장에 들러 먹을 것을 사들고 왔다. 동료 이순미씨는 “차에서 내릴 때면 꼭 두 손 가득 동료들 주려고 배달음식을 싸 들고 공장으로 와서 같이 아침을 먹었다”며 “언니네는 동료들에게 베푸느라 빠듯하게 살았다”고 기억했다.

신씨 부부는 평생 결근하거나 지각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한다. 남편 신씨가 매주 병원에 들러 신장 투석을 하더라도 오후에는 공장에 출근했다. 봉제공장 대표인 유효순(48·여)씨는 “여행 전날인 금요일도 일을 했다. 헤어지면서 ‘언니 주말 잘 쉬세요’라고 인사했는데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최규진·하준호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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