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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뻥’축구의 유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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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슈틸리케 감독이 결국 경질됐다. 팬들은 슈틸리케 전술의 특징을 기억하지 못한다. 개인 돌파는 번번이 막혔고, 세트플레이는 주로 헛발질로 끝났다. ‘뻥’축구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뻥축구는 하수(下手)가 하는 ‘닥치고 공격’, 그리운 명장 히딩크에겐 그런 단어가 없다.

교수 내각과 운동권 비서관 결합 #모두 이상주의에 치우칠 경우 #공을 질러놓고 쫓아가는 뻥축구 #탈원전, 시급 1만원, 자사고 폐지 #이 세 개 공중볼이 골라인 아웃돼 #과거의 전철 밟지 않기를 바랄 뿐

한국 정치에는 뻥축구가 대세다. 일단 공을 날려 놓고 골문을 향해 쇄도한다. 다행히 장신 공격수의 머리에 맞아 골이 터지면 좋은데, 그런 경우는 드물다. 야당이 장벽을 쌓고 저항집단이 늘어선 철통수비를 대책 없는 공중볼이 뚫을 리 없다. 정치 지형이 불리할수록 뻥축구 유혹은 더욱 커진다.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747공약’은 뻥축구 신호탄이었다. 경제성장률 7%, 일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선진국 진입이라는 화려한 공중볼은 광우병 촛불시위에 엉망이 됐다. 그러자 ‘고소영 내각’을 전방에 포진해 밀어붙였는데 급작스러운 금융위기가 정권의 초기 기세를 짓밟았다. 다급해진 정권은 4대 강과 자원외교에 나섰다. 일인 스타플레이어에 의존한 전형적 뻥축구였다. 박근혜 정권? ‘국민행복 시대’라는 근사한 공중볼은 국정원 선거 개입과 세월호 참사로 아예 아웃됐다. 청와대는 관료·장성·율사로 둘러친 막강 수비군단이었다. 뻥축구라도 간절한 시점에 마침 볼을 찼다. 그게 국정교과서와 사드 전격 도입이었고, 개헌 제안은 기가 막힌 자살골이었다. 뻥축구로 10년을 허비했으니 감독 전격 교체가 일어날밖에.

신임 감독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야당도 수비세력도 지리멸렬한 판에 골문이 환히 보인다. 천방지축 북한 도발을 제외하면 정치 지형도 그런 대로 순풍이다.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명장 히딩크라면 어떻게 했을까? 개인 돌파? 삼각 패스? 팀플레이? 짐작컨대 세트플레이를 깔지 않는 한 공중볼을 띄우지는 않을 것이다.

인수위원회가 없다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신임 감독이 뻥축구 유혹에 빠진 광경은 여럿 보인다. 성과연봉제 폐지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저항 전선이 없었다. 기업효율성 하락비용을 국민이 치러야 하는 기초 상식은 묻혔다.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그렇다. 정의로운 명분 앞에 공기업 경영진들은 입을 다물었는데, 그 비용은 결국 세금고지서에 출현할 것이다.

이에 비해 탈원전, 최저임금 1만원, 자사고·외고 폐지는 저항 전선이 막강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 순방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공대 교수 230명, 에너지 전문교수 471명이 항의성명을 냈다. ‘제왕적 조치!’, 많이 듣던 얘기다. 원전 방정식은 전문가도 합의가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원전은 재앙인가 축복인가? ‘지구는 활기찬 한국의 원자력산업을 필요로 한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미국의 환경단체가 오히려 반박성명을 냈으니 헷갈린다. 독일이 탈원전 정책에 도달하는 데 20년, 일본도 친원전으로 복귀하는 데에 6년 숙의 과정을 거쳤다. 한국은 선언 하나로 세계 최고 기술을 포기해야 할까? 세 배 급등할 전기료를 시민들이 기꺼이 부담할까? 시민배심원단이 의견을 내도 그걸로 뻥축구가 마무리되지 않는다.

소득주도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할 ‘최저임금 1만원’에는 350만 중소기업주와 700만 자영업자가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밟고 지나가라는 자포자기적 항명이다. 신용카드 수수료 할인, 세금공제 확대, 고용비용 지원, 원청의 갑질 방지 등 정부대책은 늘 듣던 소리, 막상 쥐꼬리 이익금을 쪼개야 한다. 사업을 접겠다는 신음 소리가 진동한다. 몸으로 때우거나 고용을 줄이는 게 상책이다. 결과는 위험한 골라인 아웃?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자사고·외고 전격 폐지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학부모들은 강남 8학군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조희연 교육감이 강남·강북 통합학군을 언급했다. 그러면 수서에서 수유리까지 팔십 리 길, 목동에서 상계동까지 백리 길을 통학해야 한다. 통학급행 택배서비스가 출현할까, 아니면 아예 외국으로 이탈할까? 정권의 의욕을 선명하게 하는 것과 대책 없는 뻥축구는 다르다. 설득 과정과 납득할 만한 사후 대책이 필요하다.

현 정권은 ‘교수 내각’과 ‘운동권 비서관’의 결합이다. 교수의 치밀한 이론과 운동권의 과감한 실천력이 결합하면 금상첨화인데, 두 부류 모두 공을 질러놓고 쫓아가는 이상주의에 의기투합할 공산이 크다. 결과는 뻥축구. 탈원전, 시급 1만원, 자사고·외고 폐지, 이 세 가지 공중볼이 골라인 아웃되면 정권에 치명적이다.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